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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낭만 가득한 한국의 세렝게티에서 등산화에 와인병 넣고 내려치다

by 白馬 2023. 8. 23.

수섬 위에서 바라 본 야경. 접근성이 좋은 수섬은 백패커들에게 ‘퇴근박’지로 유명하다. 어둑해진 시간에도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출근 시간, 단순히 소음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노이즈 캔슬링(이어폰 바깥 소음이 들리지 않는 기능)을 설정한 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달리는 지하철 안이었다. 문 옆에 서서 양손의 자유를 위해 몸을 벽에 기댔다. 그렇다고 양손을 요긴하게 쓸 일은 딱히 없었다. 다만 지하철 문 옆에서의 불문율인양 벽에 기대어 맞은편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그렇고, 눈을 감고 있으려니 딱히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상상할 것도 없었다. 왼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갈 곳 잃은 시선을 어딘가에 두려고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연신 쓸어 올리며 열중하는 척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막을 스치는 몇 음절에 엄지손가락을 멈췄다. 

“우린 낭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젊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사랑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린 괜찮을 거야~”

이세계의 ‘낭만 젊은 사랑’이라는 곡이었다. 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가사인가. 그리고 철딱서니 없는 나에게 꼭 맞는 노래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를 뚫고 달리는 열차는 순풍을 타고 유유히 떠가는 낭만적인 돛단배로 바뀌었다. 노랫말처럼 낭만적인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밋밋한 평지 트레킹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지어 놓은 별칭 ‘한국의 세렝게티’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는 경기도 화성의 수섬으로 가보자!

수섬의 상징 삘기 꽃 군락지는 사진 작가들의 인기 촬영 장소다.

수섬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버려진 공업용 쓰레기를 발견할 수 있다. 새벽녘 산책하다가 수거한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투를 하나씩 들고 철수 중인 이서하씨와 김효주씨.

 

수섬은 화성 앞바다의 작은 돌섬이었다. 그런데 시화 방조제가 생기고 그 일대가 간척되어 육지가 되었다. 바닥에 잠겼던 습지의 바닥이 드러나면서 갈대, 칠면초, 퉁퉁마디 등 염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독특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이곳에 곧 송산 신도시가 생긴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세렝게티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무시하고 일정을 잡았다. 비를 맞고 싶다는 김효주와 집에서 쉬는 김에 반 강제로 불려 나온 이서하까지 세 여자는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콘셉트는 리얼낭만Real Roman이다. 해질녘 두두두두둑  비가 내리는 타프 아래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멀리 세렝게티를 닮은 젖은 평원을 바라보며 조용히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이다. ‘풉!’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분명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10초도 못 버티고 선곡을 바꾸라며 왁자지껄 난리도 아닐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와인 두 병을 준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빗소리는 들을 수 없겠지만, 야영이 한결 수월할 것이었다. 저 멀리 평원 한가운데 수섬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우리를 집어 삼킬 듯 무성한 갈대숲을 헤치며 습지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수섬까지 가는 길을 고르는 건 꽤 어려웠다. 기껏 찾아낸 길이 질퍽거려 지나는 데 애를 먹었다. 빌어먹을! 그 놈의 낭만 두 번 찾았다간 늪에 빠져버릴 지경이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백패커들도 비 소식에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겨우 땅이 굳어 있는 중심부에 도착했다. 씩씩거리던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야영지를 어디로 할지 정해야 했다. 아래쪽은 이미 텐트 두 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수섬 위로 올라갔다. 밑에선 잔잔했던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덕분에 후텁지근한 공기가 재빠르게 신선한 공기로 교체됐다. 반대쪽 풍경도 볼 수 있고, 혹시 모를 장맛비를 대비해 소나무 사이로 타프도 설치할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다시 내려가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의자를 꺼내 앉아 바람에 땀을 식혔다. 세렝게티를 가본 적은 없지만, 왠지 재빠른 표범이 토끼를 쫓고, 저 멀리 평원 위에 홀로 서있는 나무 옆으로 기린 한 쌍이 머리를 내밀고 꼭대기 잎을 뜯어먹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세계여행할 때 킬리만자로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며 아프리카 대륙을 건너뛴 게 후회됐다. 해질녘 세렝게티 벌판에 텐트를 쳤다. 발포매트에 앉았다. 그 옆에 엎드려 나를 지키는 수사자의 황금빛 갈기를 쓸어 내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선 멀리 아기 코끼리의 재롱을 감상하는 말도 안 되는 이미지까지 떠올렸다. 이것은 백패킹 최고 경지에 이른다면 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았다.

비가 내리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 타프를 치기로 했다. 효주와 함께 타프의 양쪽 끝을 잡고 소나무에 묶었다. 순간 시원한 바람은 얄궂은 훼방꾼으로 바뀌었다. 바람을 타고 꼿꼿하게 수평을 유지하는 타프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모양을 잡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몇 분 동안 바람과 씨름하다 포기했다. 비가 오면 그때 생각하자. ‘수렝게티’에서의 낭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텐트 위치를 옮기려는 김효주씨. 강한 바람이 불 때 텐트를 이동할 때는 번거롭더라도 폴대를 하나라도 빼서 바람의 저항을 덜 받게 하는 것이 좋다.

텐트를 한쪽만 고정할 수밖에 없을 때는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구조물을 옮겨놓고 텐트 가장자리가 사선 바깥쪽으로 당겨지도록 가이라인을 잡아줘야 텐트가 흔들리지 않고 고정된다.

 

거친 바람 속에서 각자 위치를 잡고 텐트를 쳤다. 평평한 자리에는 가이라인을 고정할 마땅한 나무가 없었다. 한쪽 구석에 잔가지가 많은 쓰러진 나무를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바닥에 펙을 박아 고정하고, 폴을 넣어 텐트를 세웠다. 텐트를 날려버릴 듯 불어대는 강한 바람이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몸부림치는 텐트를 나무에 고정하자 잠잠해졌다. 

서하는 용케도 바람이 잠잠한 뒤편에 안전하게 텐트를 설치했다. 문제는 효주였다. 처음 설치한 장소가 맘에 들지 않아 펙을 뽑아 든 효주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자유를 갈망하는 텐트와 사투를 벌였다. 가뜩이나 체구도 아담한 그녀는 금방이라도 텐트와 함께 날아갈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김효주 너 지금 뭐해~!!!”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었다. 

“악! 언니! 뷰가 별로라서 옮기려고요!! 아 쫌! 도와줘요~!!!”

옆에 있던 서하가 함께 텐트를 진정시켰다. 우여곡절 속에서 사이트 세팅을 마치고 앉았다. 모두 벌써 기진맥진해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니 언니! 낭만 콘셉트라면서요!! 이게 무슨 낭만이에요!!” 

효주가 앓는 소리를 했다.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녘이었지만 수섬의 생명체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공구조물이지만 오래되어 낡은 탓인지 평원 위에서 위화감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물이 고인 습지에는 염생식물인 칠면초와 퉁퉁마디가 싱싱하게 자라 있어 아름다운 색감을 더했다.

“자자~ 이제 낭만의 배에 올라탔으니까 즐기기만 하면 돼~ 와인 마시자!!”

준비해 온 음식과 와인을 꺼냈다. 시내에서 주문해 온 닭강정은 온기가 남아 있어 입 안에서 부드럽고 달콤하게 씹혔다. 

“언니, 우리 와인 마셔요!” 

술을 마시지 못해 탄산수만 들이켰던 서하가 웬일로 먼저 와인을 찾았다. 

“오~~ 웬일로?” 

동갑내기 효주가 반색했다.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와인 한모금 정도는 마셔줘야징~” 

서하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좋아좋아~ 효주야 와인 오프너 줘봐~ 내가 딸게!” 

효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니 오프너 안 가져왔어요?” 

효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 없어?”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언니가 와인 마시자고 했으니까 언니가 챙겨왔어야죠~!” 

맞는 말이었다. 나는 오프너를 깜빡한 걸 화성 시내에 도착해서야 깨달았지만, 함께 와인을 준비한 효주도 당연히 오프너를 챙겼을 거라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와인을 챙기면 당연히 오프너를 챙겨야지. 히히~” 

나도 우기려다 스스로가 어이없어 말끝이 웃음으로 변해버렸다. 셋 중에 와인을 즐기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오프너는 당연히 내 담당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셋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당한 내 말투에 효주와 서하도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삘기 꽃 평원을 걷고 있노라면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속을 헤엄치는 고래를 상상했다.

 

“에잇! 낭만이고 뭐고 집어 치워요!!” 

효주가 소리쳤다.

“그래! 우리가 무슨 낭만이냐! 그냥 서바이벌로 나가자! 기다려! 어떻게든 와인 마시게 해 줄게!”

나는 예전에 TV에서 본 적 있는 오프너 없이 와인 따는 방법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등산화 뒤축에 와인을 넣고 나무에 있는 힘껏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지켜보던 서하가 물었다. 

“언니 되고 있어요?”

“아니.”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아니 되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효주가 타박했다.

“너희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민망해서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하려고 흐흐흐”

또 한바탕 웃음이 터져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고민하다가 젓가락으로 코르크를 밀어 넣기로 했다. 

“그게 될까요?”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묻는 효주에게 대답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야지!”

젓가락 세 개로 있는 힘껏 밀어 넣었다. 코르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르크가 병목을 타고 내려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하찮은 젓가락이 나의 체면을 살려줬다. 

“역시 어디 데려다 놔도 살아남을 사람이라니까요!!”

효주가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였다. 

나는 어깨가 귀에 닿을 정도로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들썩이며 잔에 와인을 따랐다. 시큼 쌉싸름한 와인을 음미하며 저물어가는 수렝게티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DJ 효주가 음악을 틀었다. 나의 신청곡은 언제나 김광석님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었다. 좀 더 일찍 태어나 그의 콘서트를 직관하지 못한 게 한스러울 정도로 사랑하는 노래였다. 낭만적인 빗소리는 없었다. 멋들어진 황금빛 노을도 없었다. 초등학생 조카가 그려 놓은 듯한 무채색의 하늘에 조금 더 하얀 해가 떠있을 뿐이었다. 낭만이란 배에 이끌려 떠나왔지만, 클래식보다는 결국 김광석님의 담담한 가사와 음색이 우리에겐 더 와 닿았다. 소리의 반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갔다. 

“언니, 우린 그냥 서바이벌 백패킹이 어울리는 거 같아요.”

“그치?” 

효주는 숟가락을 집어 올렸다.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흘러나오는 바비킴의 ‘고래의 꿈’ 가사를 따라 립싱크를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바람에 부서지는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불렀다. 낭만이 별건가? 우리가 순간을 즐길 수 있고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 이게 낭만이지. 우리를 태운 수섬배는 바람을 타고 캄캄한 수렝게티를 항해했다. 

수섬에서는 화기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가능하면 포장 음식이나 바로 먹을 수 있는 핑거푸드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수섬 위에는 소나무가 많아 바람이 많이 불어도 텐트를 설치하기에 용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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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