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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개척 산행 르포_양평 백운봉] 저 뾰족한 봉우리에 올라설 데가 있을까?

by 白馬 2022. 3. 8.

양평 성두봉을 거쳐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개척산행’

 

사나사에서 성두봉으로 가려면 수풀을 헤쳐야 한다. 이재위가 가파른 오르막에서 길을 뚫고 있다.

 

얼마 전, 새해를 맞아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나에게 “응, 이쪽으로 가! 여기로 가면 더 좋아!”라면서 단호하게 점괘를 내놨다. 뭔가 석연치 않아서 나는 점쟁이에게 물었다. 

“그 점괘는 제 사주에 적혀 있는 내용인가요? 아니면 선생님 본인의 생각인가요?” 

점쟁이는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했다. 

“응 내 생각이야, 요즘 세상 트렌드가 저쪽은 아니잖아.” 

트렌드를 꽤고 있는 점쟁이라! 점쟁이를 만난 건지 상담사를 만난 건지 헛갈려 점집을 나와 간판을 다시 올려다봤다(으, 아까운 내 돈 만 원!). 

 

하이커들에게도 점쟁이가 필요하다. 목표로 한 산행 대상지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산행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려주는 가이드 말이다. 그런 가이드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알려지지 않은 산에 간다면 더더욱. 이럴 때 필요한 게 지도다. 

하이커들에게 지도는 점쟁이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지도가 전부 다 말해 준다. 가는 중간에 어떤 위험과 맞닥뜨릴지, 어느 지점에 샘물이 있는지, 봉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봉우리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어딘지 등등. 지도는 그야말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보태지 않고 오로지 정확하게 앞길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용하고 용한 점쟁이다.

 

성두봉에서 백운봉으로 가는 길. 바위 능선이라 험하다. 방심하면 금물!

 

 

지도 점쟁이 중에서도 상급으로 용한 건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170g 모조지로 된 종이지도다. 물론 월간 <山>에서 매달 부록으로 나오는 종이지도도 좋지만 이 지도를 이용하려면 1만1,000원을 내야 한다. 구매한다고 해도 원하는 지역의 안내도가 아닐 수 있다. 

스마트폰에 표시되는 지도는 편리하지만 큰 단점이 있다. 배터리가 없으면 보기 힘들다는 것. 등산용 GPS 기계 혹은 GPS 시계는 매우 비싸며 화면이 작다. 이것도 배터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래도 종이지도가 최고다. 종이지도가 있다면 어떤 산을 가든지 든든할 거다. 

 

데이빗은 올해 12세. 사람으로 치면 60세가 넘었다. 없는 길을 헤쳤으니 지칠 만하지. 물을 주니 벌컥벌컥 마셨다.

 

한국의 산 여러 곳은 지금도 지도 점쟁이가 꼭 필요하다. 집에서 컴퓨터로 전국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지만 사람 발길 뜸한 산이 여전히 널렸다. 강원도에 그런 산이 많을 것 같지만 경기도 가평이나 양평 쪽에도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산이 빽빽한 가평의 가리산을 대상지로 잡았다. 하지만 곧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백운봉으로 바꿨다.

 

바위 구간을 우회하는 임동진. 다행히 그는 한국등산학교 졸업생이다. 바위 타는 법을 안다.

 

 

양평의 마터호른 백운봉

언젠가 백운봉의 뾰족한 봉우리를 양평의 다른 산에서 본 적 있는데,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모양이라 더 끌렸다(스위스의 마터호른을 닮았다 해서 백운봉은 ‘양평의 마터호른’이라 불린다). 뾰족한 산세가 위압감을 주는 모양인지 등산로가 생각만큼 다양하지 않았다. 사나사가 있는 서쪽 면이 특히 그랬는데, 인터넷에서 누군가 여기서 백운봉 오르는 능선을 ‘용문공룡’이라고 하면서 고생한 흔적을 엿보고 ‘여기다!’ 쾌재를 불렀다. 

 

일부러 고생길을 찾고 대만족하고 있던 나와 달리 영문도 모르고 흔쾌히 같이 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임동진(Orumm 대표)과 이재위(GQ 매거진 디지털 콘텐츠팀장), 데이빗(David, 이재위 반려견)이다. 내가 두 사람에게 “저기는 한국의 마터호른이라고 하는 데야”라고 해도 “응, 그래”라면서 시큰둥했다. 두 사람이 따라오겠다고 한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데이빗도 영문을 모른 채 차에 실려온 건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좋아요’ 100개는 기본으로 얻을 수 있는 명소 발견!

 

사나사 일주문을 지나 도로를 타고 내려오니 오른쪽에 계곡과 이어진 등산로가 나왔다. 우리는 당연히 “여기가 길인가 봐”하면서 자연스럽게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경사가 심한 언덕과 마주쳤다.

“여길 올라야 해?” 

“그렇죠? 여긴 아닌 것 같죠?” 

초반부터 엄청난 오르막을 앞에 두고 우리는 잠깐 갈등했다가 “여기가 분명 아닐 거야”하면서 다시 계곡을 되돌아 나왔다. 임동진이 내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가져가서 살펴 본 다음 말했다.

“여기, 다리가 두 개 있네, 첫 번째 다리를 건넌 다음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지도를 자세히 보니 첫 번째 다리를 지나서 왼쪽 산길로 들어가야 그런대로 편하게 성두봉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도로로 나와 다리를 건너니 왼쪽으로 사나사 약수터가 나왔다. 뒤쪽으로 등산로가 흐릿하게 나 있어 우리는 하수구로 물 빠지듯 등산로로 빨려들어갔다.

다음부터는 지도가 알려주는 정보를 철저하게 따랐다. ‘지도 점쟁이’의 설명을 곁들인다. 

“자, 너희는 바른 길로 들어왔어. 잘했어. 이제 계곡을 따라서 그대로 들어가면 될 거야. 등고선이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이 보이지? 거기에 파란색 실선으로 물길이 그어져 있잖아. 그렇지. 거기로 가면 돼. 길이 안 보여도 끝까지 계곡을 따라가! 가다가 오른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보일 거야. 그게 바로 성두봉인데, 역시 제대로 된 길이 보이지 않을 거야. 그래, 맞아 길이 없어도 봉우리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야 해. 그러면 약 40분 뒤에 성두봉에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숲을 헤치는 임동진. 한국등산학교 졸업생다운 패기!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눈앞에 등산로가 사라져도, 사면에서 발목이 꺾이고 모래바닥에서 미끄러져도 의심 없이 봉우리를 향해 계속 올라갔다. 데이빗도 군말 없이 잘 따라왔다. 가끔 간식을 원하는 아련한 눈빛을 보내면서.

오르막에 붙은 지 40분 정도 지났을 때 성두봉 정상에 올라섰다. 오른쪽에는 산 사면이 광범위하게 깎여 민둥민둥했는데, 군에서 쓰는 용문산사격장이다. 사격장은 2030년까지 이전할 계획이다. 용문산사격장 이전은 양평군민의 숙원사업이었다. 사격장 때문에 각종 사고(1994년부터 무려 14건)가 생겨 주민들의 피해가 컸는데, 2년 전 현궁 미사일 한 발이 민가 논으로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사격장 이전에 도장을 찍었다. 이건 양평군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하이커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지도 점쟁이가 또 한마디 거들었다.

 

백운봉 오르기 전 안부에서 발견한 약초꾼들의 움막. 다들 약초 캐러 간 모양인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운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더 편해지겠네. 삼태재에서 마을까지 이어진 계곡 보이지? 이 계곡이 볼 만할 것 같단 말이지. 2030년이 기대되는데!”

성두봉에서 보이는 경치가 대단했다. 아래로 양평군청이 쫙 펼쳐져 있고 위로는 백운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여기 앉아서 노닥거리기 딱이었는데, 지도에서 보이는 빽빽한 등고선이 남은 험난한 길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올라가다 보니 지도 점쟁이가 우리에게 예고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바위 구간이었다. 성두봉을 지나 백운봉까지 바위 능선이 이어지는데, 멀리서 봤을 때는 잔잔해 보이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지나기 꽤 까다로운 구간이었다. 지도에는 이 부분이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저 빽빽한 등고선으로만 되어 있어 우리는 살짝 당황했고 때문에 걷는 속도가 급속도로 줄었다. 데이빗은 이 구간을 통과하기가 어려워 이재위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안고 올랐다.

 

“정상이다. 다 왔다!” 고 소리쳐도 둘의 표정은 심각했다.

 

쉼 없이 바위 능선을 탄 끝에 우리는 겨우 백운봉 정상 전 안부에 도착했다. 무려 3시간 정도 걸렸다(점심시간 1시간 포함). 오랜만에 평지를 만난 게 반가웠던 모양인지 데이빗은 숲을 휘저으며 뛰어다녔다. 

“마음껏 뛰고 쉬어라. 곧 굉장한 오르막과 만날 테니까.” 

지도 점쟁이가 말했다. 

잠깐 쉬었다가 백운봉을 향해 올랐다. 등산로는 희미했다. 오르기 편한 곳이 곧 등산로였다. 우리는 더 천천히 느긋하게 움직였다. 정상을 300여 m 남겨놓고 나는 같이 온 친구들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외쳤다. 

“다 왔다! 정상이다!” 

친구들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내가 소리친 곳에서 바위 능선을 조금만 더 타면 백운봉 꼭대기였다. 모두 정상에 오른 시간은 오후 1시 30분쯤이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해 무려 4시간 반이나 걸렸다. 용문산 조망이고 뭐고 지친 우리는 앉을 새도 없이 하산을 시작했다. 뾰족한 봉우리에 걸맞게 내려가는 계단이 상당히 가팔랐다. 데이빗은 쌩쌩하게 우리를 앞질렀다. 

“구름재가 여기 바로 아래 있어요. 거기서 사나사로 곧장 하산할 거예요.” 

 

백운봉 정상. 정상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지치면 쓸모 없다. 인증사진이나 남기자!

 

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대로, 아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말했는데, 구름재는 예상보다 300m 정도 더 떨어져 있었다. 친구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구름재에서 사나사까지도 한참 걸렸다. 나는 지도 점쟁이가 일러준 대로 계곡 중간에 서서 “다 왔다!” 고 외쳤는데, 주민욱 기자가 끝내 한마디 했다. 

“대체 뭘 보고 다 왔다고 하는 거죠?” 

친구들도 그제야 한마디씩 했다. 

“다음부터는 길 좀 있는 데로 갑시다.” 

데이빗의 눈빛은 이랬다. 

“또 이런 데 데려오면 죽여버릴 거야!”  

 

우리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준 장비들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개척산행’은 힘들다. 하지만 좋은 장비가 있다면 어떤 길이든 즐겁게 헤쳐나갈 수 있다!

 

임동진(42세, ORUMM 대표)

아웃도어 의류를 만드는 회사 대표다. 그의 주 전공은 볼더링.

머리 | 아크테릭스ARC’TERYX 카이어나이트 후디kyanite hoody. 

상의 | 오름 웜업 베스트WARMUP VEST

바지 | 오름 데님 라이크드 새터데이DENIM LIKED SATURDAY

배낭 | 블랙다이아몬드BLACK DIAMOND 디스턴스DISTANCE 15. 트레일러닝용으로 나왔지만 용량이 커서 당일치기 등산용 배낭으로 쓰기에도 좋다. 등산용 스틱을 접어 배낭 양 옆에 꽂아서 쓰기에도 좋다.

신발 | 라스포르티바LASPORTIVA 캡티바KAPTIVA

중장거리 트레일러닝화. 당일치기 산행에는 가벼운 트레일러닝화로도 충분히 산행을 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라스포르티바 캡티바는 브랜드에서 개발한 아웃솔, 프릭션Frixion 기술이 적용돼 접지력이 좋다. 

 

이재위(37세, GQ KOREA 콘텐츠 에디터)

서핑, 등산, 클라이밍, 캠핑 등 각종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마니아다. 

머리 | 나이키NIKE ACG 발라클라바

상의 | 나이키NIKE ACG 미저리 리지MISERY RIDGE

강아지 | 데이빗(12세, 폭스테리어) 

바지 | 파타고니아PATAGONIA 스탠드업 팬츠STAND UP PANTS

배낭 | 나이키NIKE ACG 카스트KARST 백팩

하이킹용으로 나왔지만 일상생활에 써도 무방한 디자인을 갖췄다. 

신발 | 나이키NIKE ACG 고어텍스 마운틴 플라이MOUNTAIN FLY

나이키는 러닝화를 잘 만드는 브랜드이지만 가끔씩 등산화도 만든다. 고어텍스라고 쓰인 고무 밴드 안에 신발끈을 조일 수 있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지만 발을 꽉 잡아 주는 부분이 약하다. 

 

윤성중(40세, 월간 <산> 기자)

클라이밍, 트레일러닝, 볼더링, 캠핑 등 각종 아웃도어 활동에 관심만 많은 만년 등린이.

상의 | 아크테릭스ARC’TERYX

바지 | 언더아머UNDER ARMOUR 콜드 기어COLD GEAR 타이즈

앞가방 | 실 라인SEAL LINE 지도 케이스. 종로 5가 등산 장비점에서 어렵게 구한 케이스. 

배낭 | 오스프리OSPREY 듀로DURO 15

트레일러닝용이지만 넉넉한 수납공간을 자랑한다. 덕분에 가벼운 당일치기용으로도 알맞다. 사이로 끼워 넣는 방식이다. 배낭이 흔들리지 않게 몸에 밀착시키는 데 아주 탁월하다. 

신발 | 라스포르티바LASPORTIVA 아카샤AKASHA

울트라 마라톤 같은 장거리 트레일러닝용으로 나온 신발. EVA 중창을 사용해 적당한 쿠션과 반발력을 가진 것이 장점이다. 

 

렉타 RECTA 나침반

스위스의 나침반 브랜드 렉타는 등산용 나침반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실바SILVA와 견줄 수 있는 브랜드다. 1897년에 설립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브랜드로 최근에는 GPS 기기로 잘 알려진 순토SUUNTO에 인수되어 지금은 핀란드에서 제조된다. 이 귀한 나침반을 당근마켓에서 무려 4,000원에 입수했다. 

 

블랙다이아몬드 디스턴스 카본 DISTANCE CARBON FLZ

무게가 가볍다. 그리고 쉽게 접어 깔끔하게 보관한다. 두 개의 장점만으로도 디스턴스 카본 폴을 쓸 이유로 충분하다. 제품 이름에서 FL은 길이 조절부를 고정시키는 플립락을 의미하고, Z는 알파벳 Z 모양으로 접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폴을 제대로 쓰려면 고정 버튼이 나올 때까지 폴의 상단부를 끝까지 뽑아야 한다. 

 

 

산행 길잡이

한겨울 개척산행으로 이곳을 찾았다면 주변의 유명한 유적지를 지나치기 쉽다. 왜냐하면 길이 꽤 험하고 여기를 통과하려면 힘이 들어 다른 데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다. 이 코스는 등산 중상급자용으로 체력이 자신 있고 등산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성두봉으로 가는 길은 뚜렷하지 않다. 사나사에서 마을 쪽으로 500m쯤 내려와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사나사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뒤쪽 흐릿한 등산로를 따라가면 된다.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중간에 계곡을 건너 오른쪽에 솟은 성두봉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등산로는 없다. 성두봉에서 백운봉까지 길은 잘 나 있다. 하지만 바위 능선을 통과해야 하므로 시간이 꽤 걸린다. 백운봉에서 구름재를 지나 내려오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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