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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동해 무릉계곡 두타산… 무릉계는 유불선 녹아든 옛 선비 놀이터

by 白馬 2021. 5. 20.

'한국의 명승’ 명산
무릉반석·쌍폭·용추폭포 등 절경 이어져… 두타산인 이승휴·양사언 자취도 남아

 

무릉계곡의 무릉반석은 1,500여 평이나 되는 널찍한 암반에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자취가 암각으로 남아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7호, 2010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지정. 역사문화적·경관적·식생적 가치를 두루 지닌 두타산 동해 ‘무릉계武陵溪’가 지니고 있는 족보다. 일명 ‘무릉도원’이라 부른다.

 

<고려사>열전 이승휴편에 ‘이승휴는 자가 휴휴休休이며, 경산부 가리현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배움에 힘써서 고종 때 과거에 급제했다. 두타산 구동에 들어가 직접 밭갈이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 세가편에서는 ‘덕종 때(1034년) 두타산인 이승휴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지어 올렸는데…’라는 내용도 나온다.

 

<삼국사기> 제사조 ‘중사中祀로 지내는 4해’편에 ‘4해는 동쪽의 아등변, 남쪽의 형변, 서쪽의 미릉변, 북쪽의 비례산非禮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실직군(현재 삼척시)에 있는 북쪽 비례산이 지금 두타산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조선시대 김홍도도 두타산 무릉계곡을 방문하고 한 폭의 그림을 남겼다. 출처 한국데이터진흥원.

 

조선시대 4대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 등 숱한 시인 묵객들의 시와 이름이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두타산 무릉계는 문화역사적 가치와 산림유전자원이 풍부한 자연경관적 가치, 그리고 학문적 가치까지 두루 갖춘 명승지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이 지난 2008년 무릉계를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밝힌 사유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동해시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한 약 4㎞에 달하는 계곡이다.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너른 무릉반석과 호암소, 선녀탕, 장군바위, 쌍폭, 용추폭포 등 다양한 지형이 펼쳐져 동해안 제일의 산수라 할 정도로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무릉계곡 이름은 조선시대 삼척부사 김효원이 붙였다 하며, 고려시대 동안거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으로 전한다.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는 조선 4대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옛 선비들의 풍류 공간이자 수행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위가 갈라지며 생겨난 폭포와 기암절벽들이 독특하며, 특히 바위가 두 방향으로 갈라지며 생겨난 쌍폭과 동서 방향으로 갈라지며 생겨난 절벽에 따라 용추소가 특이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렇듯 무릉계곡은 화강암의 침식 및 퇴적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지형을 보여 지질학적 가치 역시 매우 높다.’

 

학이 와서 놀았다고 전하는 학소대. 왼쪽에 모형 학을 만들어 고정시켜 놓았다.

 

무릉계를 안고 있는 두타산頭陀山(1,353m)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두타’란 지명은 인간사의 모든 번뇌를 털어 없애고 물질을 탐착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불도를 수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 산들의 지명은 대개 불교에서 유래했다. 특히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더더욱 그렇다. 자연히 사찰이 번성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무릉계 옆에 있는 삼화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쓴 사찰로 알려진 천은사,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관음암 외에도 10여 개의 명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642년) 창건한 삼화사에 있는 보물 제1277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도 볼거리다.

 

무릉계곡의 무릉은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했다. 세상과 따로 떨어져 복숭아꽃이 만발한 별천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실제 무릉계곡은 그 명칭에 손색없으며, 길이는 약 4㎞ 된다. 입구 호암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용추폭포까지를 말한다. 무릉반석, 쌍폭, 용추폭포, 학소대, 양사언 석각 등 기암괴석과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낸 산답게  끊이질 않는 깊고 푸른 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 환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한다. 용추폭포와 무릉반석은 동해 2경과 3경이다.

 

무릉계곡 위 청옥산 능선 중간쯤 자리 잡고 있는 관음암.

 

무릉반석은 1,500여 평이나 되는 하나의 흰돌로 평평하게 이뤄져 있어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절경의 장관을 연출한다. 자연의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또한 암석에 수 놓은 듯 새겨진 갖가지 석각은 해석하는 재미와 함께 옛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석각은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중춘玉壺居士書辛未仲春’이 있다. 옥호거사가 신미년 봄에 글을 남겼다는 의미다. 무릉선원은 도교 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석각은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을 방문했을 때 무릉계곡에 와서 썼다는 설이 있고,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 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남겼다는 설도 있다.

무릉계곡 최상류에 쌍폭과 함께 있는 용추폭포는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을 지닌 폭포로 상탕, 중탕은 옹기항아리 같은 형태로, 하탕은 진옥색의 큰 용소로 이뤄져 있다. 폭포 한쪽에는 어느 묵객이 새겨놓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대형석각이 용추폭포의 자연경관을 적확하게 대변해 준다. 부사 유한준이 ‘용추龍湫’라 이름 짓고 글을 썼다고 전한다.

 

무릉계곡 최상류에 있는 용추폭포. 옛 선비들이 각종 석각을 남긴 가운데 오른쪽 초서체가 별유천지라고 한다.

 

그 외에 계단식으로 쌓은 것 같은 기암절벽인 학소대와 그 위에서 쏟아져 내려 장관을 연출하는 관음폭포, 두 개의 폭포가 양쪽 암벽에서 쏟아져 내려 한 곳으로 떨어지는 환상적인 쌍폭, 두 개의 폭포가 하나로 합쳐져 깊고 푸른 소를 이룬 선녀탕 등으로 인해 계곡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또한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기암괴석들인 병풍대와 장군바위, 베틀바위, 거북바위, 신선바위 등은 이곳을 무릉계곡이라고 명명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에 ‘두타산은 부 서쪽 45리에 있다. 산 중턱에 돌 우물 50곳이 있으므로 그대로 오십정五十井이라 부른다. 그 곁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을 사람이 봄 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 고려 충렬왕 때에 이승휴가 전중시어殿中侍御로서 정사를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파직당했다. 승휴는 이 산 밑에 터를 잡아 살면서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호하였다. 70살에 심왕瀋王의 명을 받고 산에서 나와, 서울에 왔다. 그리하여 이런 시가 있다. “외로운 종적이 몇 해나 강산에 의지했더니, 다시 서울 땅 밟으니 한바탕 꿈속이어라” 하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타산은 옛날부터 물이 풍부했고, 경관이 뛰어났던 듯하다. 산신을 모신 신사가 있고,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예로부터 족보 있는 명산이었다.

 

두타산 등산로는 ▲관리사무소에서 무릉계곡을 즐긴 뒤 박달령을 거쳐 두타산을 밟고 두타산성으로 하산하면 최소 8시간은 걸린다. ▲관리사무소에서 두타산성을 거쳐 두타산을 밟고 그 길로 하산하면 7시간 정도 소요. ▲관리사무소에서 두타산성을 거쳐 두타산과 청옥산 정상을 밟고 연칠성령과 사원 터를 지나 원점회귀하면 10시간은 잡아야 한다. ▲정상을 밟지 않고 관리사무소에서 베틀바위 전망대~미륵바위를 지나 두타산성으로 내려오면 3시간 정도 소요. ▲무릉계곡 끝 용추폭포까지 천천히 구경하면서 갔다가 그대로 내려오면 그것도 3시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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