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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연 깊은 세 건축가의 작품이 나란히… 요란하지 않아 걷기 좋은 길

by 白馬 2018. 5. 15.

근대의 애환이 깃든 정동길

서울 구도심에서도 정동은 특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단순히 나무와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야기가 많이 깃들어 있어서다. 서울 그 어느 지역보다도 근대사의 애환이 서려 있다. 일제 강점기와 민주화 시대의 흔적들도 정동 안팎에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동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격체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아늑한 벽돌 건물이 줄지어 있는 서울 광화문의 세종대로 21길. 왼쪽부터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 윤승중이 설계한 조선일보 미술관, 김수근이 설계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이 연달아 있다. 황두진
아늑한 벽돌 건물이 줄지어 있는 서울 광화문의 세종대로 21길. 왼쪽부터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 윤승중이 설계한 조선일보 미술관, 김수근이 설계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이 연달아 있다.
정동의 도시 구조도 특이하다. 서울 구도심 지도를 펴놓고 보면 유독 정동에는 길이 몇 개 없다. 서울 구도심을 실핏줄처럼 누비고 다니는 작은 골목길들이 보이지 않는다. 덕수궁, 영국대사관, 미국대사관저, 러시아 대사관, 배재학당 터, 서울시 소유 공공건물 등 유독 큰 덩치의 건물과 그 땅들이 서로 어깨를 밀치며 들어서 있다. 그래서 공간 체험은 의외로 단순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도중에 옆으로 빠질 일이 없이 시작했던 곳의 반대편으로 나온다. 다시 돌아가려면 왔던 길을 밟아가거나 아예 정동 밖으로 우회해야 한다. 덕수궁과 영국대사관 사이의 길이 완전히 열리면 그나마 답답한 정동에 숨통이 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정동길과 덕수궁길이 잘 알려졌지만 그보다 작으면서 훨씬 아기자기한 길이 정동에 또 하나 있다. 공식명칭은 '세종대로21길'. 하지만 이 이름으로 이 길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서울시의회 사이로 난 길이라고 해야 알 수 있다. 서쪽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이 길은 지금 시점으로 보면 세종대로의 이면도로지만, 태평로가 뚫리기 전인 1911년 지도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가 꽤 깊다. 바뀌기 전 이름이 유학 교육기관의 이름을 딴 '서학당로'인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길이었을 것이다.

현재 이 길에선 벽돌의 느낌이 강하다. 사진의 왼쪽은 성공회 성가수녀원인데 한옥을 제외한 부분은 1990년 완공됐다. 설계자는 김원으로, 그는 이웃하는 성공회 성당의 증축을 맡았던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 옆에 있는 조선일보 미술관(1988)은 건축가 윤승중이 설계한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22년 지어진 정동제일예배당이 있었다. 1946년부터 덕수교회로 불리다가 1980년대 초 이곳을 떠나 성북동으로 이전했다.

그 옆 건물엔 지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이전엔 한양빌딩이었다. 그 이전엔 뜻밖에도 안기부 정동분소인 정동빌딩(1979)이었다. 설계자는 김원과 윤승중의 스승이기도 한 건축가 김수근이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건물 중 하나다. 서로 인연이 있는 세 건축가가 한 거리에 작품을 나란히 남긴 것도 드문 일이지만 모두 벽돌을 사용한 점, 오래된 건물일수록 디자인이 더 모던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길의 물리적인 상황은 매우 쾌적하다. 길 건너편도 통일감은 떨어지지만 요란하지 않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무엇보다 이 길은 보행자가 걷거나 잠시 쉬기에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길의 시작점,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이 철거된 자리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세종대로 일대 역사문화 특화공간'이 완성되면 더 걷기 좋은 거리가 될 것이다. 국세청 남대문 별관이 허물어지면서 80여 년 만에 다시 세종대로와 면하게 된 성공회 성당의 경관은 덤이다. 걷기 좋은 길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곧 또 다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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