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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삼라만상이 가라앉는 곳… 헤어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었다

by 白馬 2017. 10. 28.

'생태의 보고'로 떠나는 여행
국내 最古·最大 원시 습지
한반도 생성시기와 같은 1억4000만년의 세월 담겨
2000여 종의 온갖 생물이 4개의 늪에 웅크리고 있어

숲이 달아오를 때 늪은 가라앉는다. 숲이 몸을 흔들며 호흡이 가쁠 때 늪은 몸의 가장 아득한 곳으로 심폐를 내려보낸다. 숲이 수북한 체모를 날리며 신음하는 동안에도, 늪은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지는 침처럼 고요하다. 그것은 숲이 바깥이고 늪이 안쪽이기 때문이다. 가을 끝 무렵에 이르러, 바깥을 떠돌던 바람이 비로소 안으로 들기 시작한다. 이맘때 누군가 지난 계절의 결락을 뒤적이며 자꾸 내면으로 침잠하는 건 이 탓이다. 안쪽 가장 깊숙이 개흙 같은 곳에 간밤 내가 잃어버린 얼굴이 있을지 모른다. 바깥을 헤매던 눈을 안으로 들인다. 모든 탈락한 것이 모여 거대한 색깔을 이루고 있다. 숲이 무너질 때 늪은 깊어진다. 때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는다.

지난 21일 새벽녘의 우포늪. 늪 위에 그날의 첫 해, 구름, 풀, 배, 새, 그 외의 모든 자연의 그림자가 가라앉고 있다. 저것들이 오래 묵으면 늪을 구성하는 거대한 펄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남 창녕에 당도한 오전 5시, 우포늪의 밤은 지평선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그 위로 별이 부유물처럼 떠 있다. 가끔 풀섶에서 벌레 소리가 떠올랐다가 속으로 숨는다. 이 늪에 1억4000만 년의 시간이 썩지 않고 고여 있다. 한반도 생성 시기와 맞물린다고 한다. 그 골동(骨董)의 냄새가 새벽에 이르러 가장 진하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원시 내륙 습지다. 낙동강의 배후습지로, 화왕산 인근 토평천과 소하천의 물이 좁아지면서 흙과 물이 반죽을 이룬 것이다. 1997년 첫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올해 20주년. 이듬해 습지 보전을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의 보존습지로도 지정됐고, 지난 7월엔 '람사르 습지도시 인증제' 국내 내륙습지 후보지역으로 선정됐다. 이름이 더 깊어질 것이다.

전망대 계단 밑으로 소벌이 내다보인다.
전망대 계단 밑으로 소벌이 내다보인다.
우포늪 너머 구룡산 일대의 산 그림자가 늪의 깊이를 더한다.
오전 6시가 되자 멀리서 구름이 분홍빛으로 울렁이기 시작한다. 구름이 늪 위에서 곧 빨려 들어간다. 새가 날기 시작하자 새 그림자도 늪에 가라앉는다. 잡다한 그림자를 받아먹고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불쑥 튀어 오른다. 수면에 주름이 느리게 퍼진다. 1억 살의 주름. 그 주름이 텅 빈 거룻배 두 척에 닿는다. 가로 약 2.5㎞·세로 1.6㎞ 규모의 늪에 2000여 종의 온갖 생물이 웅크려 있다 한다. 배 안에 널브러진 어구(漁具)로 보아, 이 늪의 진짜 표정은 수면 아래에 있을 것이다. 지상의 빛이 진해지자 이미 떠 있던 별들이 서둘러 늪으로 가라앉는다. 논우렁처럼 반짝이다 곧 다른 차원으로 내려가는 동그라미들.

가수 조관우가 '늪'을 부를 때 원치 않는 감정의 비극적 수렁으로 안내한다면, 가을의 늪은 아무 감정의 점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동요하게 하는 정물이고, 동시에 감정 밑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다. "늪"이라고 발음할 때 입술은 자연히 앙다물어지고, 그것은 늪처럼 말 없음의 입술이 된다. 그러나 다문 입안에서 혀는 맹렬히 살아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 침묵은 능동태라 할 것이다.

자다 깨 하품하듯이 물안개가 피어난다. 해가 멀리서 그물을 던지듯 빛을 떨군다. 늪이 온탕처럼 포근해 보인다. 얼어 있던 억새며 갈대며 온갖 잡초가 땀에 젖더니 일순 단풍이 든다. 이 풍경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쭈그려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부엉덤 근처에서 바라본 소벌. 물비늘이 수초의 다채로운 색으로 일렁인다.
오리떼가 통통한 엉덩이를 과시하며 늪을 누빈다.
중력은 공평한 것이다. 지구의 모든 것은 결국 가라앉는다. 그러나 가라앉는다고 전부 익사하는 것은 아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계속 호흡을 물결에 흘려보내는 것들, 찌개처럼 보글보글 올라오는 숨의 모양이 늪을 살아 있게 한다. 왜가리 한 마리가 수면을 낮게 날아간다. 부리가 물을 스칠 때 그 새는 늪에서 자신의 부리가 솟아올라 오는 착시를 느꼈을 것이다.

늪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늪은 물에서 육지로 이행하는 생태적 천이의 중간 단계로, 고도의 종(種) 다양성을 지니는 생명 부양력 높은 생태계다. 특히 우포늪은 천혜의 탐조(探鳥) 포인트. 해오라기·백로·물닭·노랑부리저어새부터 황조롱이까지 130여 종의 새가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따오기가 있다. 우포늪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우포따오기복원센터'가 보인다. 국제적 보호종인 따오기는 1979년 이후 국내에서 멸종됐으나, 2008년부터 실행된 복원 계획 덕에 현재 개체 수가 313마리로 늘었다. 조만간 자연 방사할 예정이라는데, 우포에서 귀한 울음소리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우포늪은 가장 큰 소벌을 중심으로 나무벌·쪽지벌·모래벌 등 4개의 늪으로 구성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늪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으므로 늪을 걷는다는 것은 늪의 관상을 헤아리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물속에 물여뀌·순채 같은 것들, 길가에 흰꽃여뀌·왕버들 같은 작은 얼굴들은 여전히 사소하면서 진귀하다. 나무벌제방에서 돌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사초(莎草) 군락지, 조금 더 들어서면 정글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막다른 길이 나오면, 거기가 바로 10m 높이의 퇴적암 절벽 부엉덤. 수리부엉이가 매년 겨울 둥지를 틀고 번식하는 곳이다.

1000년간 비밀처럼 웅크리고 있던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오랜 땅에 전설이 없을 리 없다. 먼 옛날 소목마을에 연인 판바우와 바우덕이 살았다고 한다. 혼인을 약속했으나 새로 부임한 원님이 바우덕을 차지하기 위해 판바우를 전쟁터에 보내버리고, 바우덕은 판바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벼랑에 몸을 던진다. 훗날 멀쩡히 살아 돌아온 판바우도 끝내 세상을 등지자 두 사람의 무덤 근처에서 가시연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 모래벌 산등성이엔 수령 300년짜리 팽나무가 있다. 팽나무 수형(樹形)이 하트 모양이라 '사랑나무'로 불린다.

버드나무 밑으로 퍼져 나가는 잠자리 날개 같은 물결. 오리 떼가 날아오른다. 엉덩이부터 떨어져도 아파 보이지 않는다. 하루종일 대가리를 늪 아래에 박고 뭔가를 뒤적이고 있다. 시간이 빚어놓은 이 거대한 반죽에 한 번 발을 담근 이상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전날 먹은 음식물이 몸의 하구로 전부 내려가자 허기가 온다. 입구 근처 식당에 들어가 늪에서 잡은 잉어를 주문한다. 시커멓게 찜이 된 놈의 속을 젓가락으로 벌리자 희고 탱탱한 살이 튕겨 나온다. 지하의 것들은 대개 보물을 품고 있는 법. 소화를 시킬 겸 교동 고분군에 들렀다 온천의 고장 부곡면으로 가 발가벗는다. 온천물에 들어간 사람들이 전부 가라앉아 나올 생각을 않는다. 늪에 빠진 듯, 꼼짝할 수가 없다.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