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산행 | 여수 영취산] 역경 딛고 설렘으로 피어난 그리움의 바다를 보라
진달래축제장~가마봉~정상~봉우재~시루봉~흥국사 7km
영취산은 생활력 강한 산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보겠다고 악 쓰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독한 산이다. 빼어난 암릉을 갖춘 산세로 보나 화려한 경치로 보나 영취산은 보통 산이 아니다.
4월이 되면 영취산은 핑크빛 여왕이 된다. 군데군데 핀 진달래가 아니라, 산사면 전체가 한꺼번에 분홍색 꽃으로 가득 찬다. 진달래의 바다라 해도 좋을 이 화려한 경관이 510m 높이의 작은 산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취산을 스타로 만든 건 8할이 역경이었다.
영취산이 자리한 곳은 여수국가산업단지다. 끝없이 늘어선 공장들이 지독한 공해물질을 쉴 새 없이 내뿜는 자리에 있다. 역설의 꽃 진달래는 키 큰 나무들이 죽은 자리에 억척같은 생명력으로 버텨, 영취산의 주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공해에 강한 진달래가 지금의 영취산 명성을 만든 것이다. 건드리면 툭 떨어질 것처럼 여리디 여린 분홍 꽃잎은 진달래가 살아남고자 하는 피 같은 노력의 징표인 것이다.
영취산은 코스를 길게 잡아도 3~4시간 정도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과거에는 정상 동쪽 상암마을을 기점으로 산행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북쪽의 진달래축제장과 여수를 대표하는 천년고찰 흥국사가 주된 기점이다. 다만 흥국사는 문화재관람료 2,000원을 내야 하기에 진달래축제장으로 올라 능선을 종주해 흥국사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달래축제장은 공장산업단지 뒤 공터다. 축제가 없을 때는 이곳이 축제장인지 공터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차에서 내리자 그 유명한 영취산 매연이 확 덮쳐온다. 역한 냄새에 당혹감이 들지만, 곧장 배낭을 둘러메고 산에 든다. 함께 산행하는 이는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학생 이장미씨다. 등산을 즐겨 5년 넘게 산행을 해온 보기 드문 20대 꽃처녀다.
시작은 임도다. ‘영취산 정상 1.9km’라 적힌 이정표를 따른다. 임도의 경우 굽이굽이 횡으로 이어지는 데 반해, 직상으로 능선을 올려치는 성질 급한 임도다. 호흡이 조금씩 깊어지지만 매연 때문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가 불편하다.
횡으로 지나는 임도를 만나는 사거리다. 차량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듯 한쪽에는 주차 가능한 공간이 있다. 사거리를 지나면 묘 자리가 나타난다. 얼핏 보면 묘인데 봉분이 없다. 다가가 보니 비석이라 생각했던 대리석에 ‘진달래꽃’이란 시가 적혀 있다. 여수 향토시인 김종안의 시비다.
‘그대의/ 저 능선과 산자락 굽이마다/ 설레임으로 피어난/ 그리움의 바다를 보아라// 모진 삼동을 기어이 딛고/ 절정으로 다가오는/ 순정한 눈물을 보아라// 그리하여 마침내/ 무구한 사랑의 흔적으로 지는/ 가없는 설움을 보아라 // 그러나 그대는 알리라/ 또 전설처럼 봄이 오면/ 눈물과 설움은 삭고 삭아/ 무량한 그리움으로/ 다시 피어날 것을’
봉분 없는 묘의 묘비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마음속에 진달래의 바다가 펼쳐진다. 진달래축제 때 시산제 등을 올리는 제단인 듯하다.
임도가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어도 비탈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성격 급한 산길 덕분에 산행 시작 30분 만에 주능선 전망 터다. 여수와 광양 사이의 바다가 좁아 보일 정도로 공장이 빽빽하다. 거기서 뿜어 올라오는 흰 연기들. 여린 진달래가 이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천상화원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주능선부터는 진달래와 억새가 많아 시야가 트인다. 정상 전의 위성봉인 가마봉이 보인다. 둥글둥글 정선 민둥산 같은 산세가 정감이 간다. 다만 추위가 가지 않은 3월이라 빈 나뭇가지만 붐빈다. 억새길에 들어서니 땀 흘리는 만큼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는 공장지대와 바다가 드러나고, 왼쪽으로 상암동 일대의 농촌 풍경이 가라앉아 있다.
주능선을 이정표에는 ‘꽃등길’이라 표현했다. 온통 진달래로 뒤덮인 능선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정면으로 가마봉이 큼지막한 가마형태로 곡선을 그리며 복스럽게 버티고 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푸른 소나무가 능선에 몇 그루 있는지 헤아릴 정도다.
진달래가 빼곡한 산등성이 사이로 데크계단이 나있다. 꽃이 피면 솜사탕처럼 달콤한 계단이겠지만, 지금은 오르는 것에만 집중한다. 가마봉 정상에 닿자 땀값 하는 경치가 동서남북으로 반긴다. 데크가 암릉 위에 성채처럼 연결되어 있고, 너른 전망대가 있어 오래 머물며 구경하기 제격이다.
능선 너머에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영취산 정상이 조각 미남의 콧날처럼 오똑하게 서있다. 광양만을 둘러싼 해안선 곳곳에 공장이 포진해 흰 연기를 뿜어낸다. 산에서 보기 쉽지 않은 낯선 풍경이다.
가마봉부터는 용의 등골을 타고 가는 듯한 화려한 바윗길의 연속이다. 열린 경치는 기본이며, 편안한 흙길과 바윗길이 번갈아 나와 언제 매연이 있었냐는 듯 들뜬 걸음으로 걷게 된다. 가마봉과 정상 사이에는 암봉이 있다. 오르내림이 있는 코스지만 경치가 시원해 정상으로 이어진 오름길은 곳곳이 바위 전망대다.
여수시에서 친절하게 데크계단으로 모두 정비해 바위맛을 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대중적인 진달래산답게 안전하고 화려하다. 흰색 공장 건물 뒤로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와 묘도대교가 시원하게 뻗어 있어 틈날 때마다 눈길이 간다.
명산답게 정상은 1,000m대 산 꼭대기만큼 경치가 시원하고 너르다. 데크 헬기장과 통신탑, 정상 표지석, 등산안내도, 전망데크를 모두 수용하고도 공간이 남는다. 영취산 산행의 정점다운 경치가 드러난다. 멀리 동쪽 남해와 서쪽 순천까지 시야가 열린다. 아직 진달래가 없는 영취산은 입산을 통제한 것마냥 아무도 없다. 덕분에 풍성한 고요를 마음껏 누린다.
정상 아래에는 도솔암이 있다. 전기가 들어와서인지 암자라고 하기엔 규모가 크다. 영취산은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내려갈 때도 끝없이 가파른 계단으로 한 번에 고도를 내리게 한다. 드넓은 안부인 봉우재는 진달래축제장이다. 4월이 되면 시장통처럼 등산객으로 붐빌 것이다. 보통 여기서 흥국사로 하산하지만, 짧은 산행이 아쉬워 능선 오르막으로 향한다. 봉우재를 기준으로 영취산과 시루봉으로 나뉜다. 옛문헌에는 439m봉이 영취산으로, 510m봉이 진례산으로 되어 있어 원래 이름을 찾아 주자며, 바꿔 부르자는 의견이 있다. 허나 이름이 워낙 굳어져 정상인 510m봉을 영취산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친 암봉의 매력 있는 시루봉
봉우재를 떠나 잠깐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바람이 지배하는 야생 암봉에 닿는다. 영취산과 달리 데크 전망대 없이 낭떠러지 바위 위에 올라 스릴 있는 경치를 맛 볼 수 있다. 현지 산악회에서 이곳에 ‘시루봉’이라 적은 알루미늄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작은 헬기장을 지나 439m봉에 닿자 모처럼 경치 없는, 나무로 둘러싸인 봉우리다. 워낙 경치 좋은 봉우리들을 지나온 탓에 아쉬움은 없다. 돌탑이 있고 표지석처럼 툭 튀어나온 삼각점이 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흥국사로 내려선다. 영취산 쪽과 달리 등산로 정비가 깔끔하지 않아 길이 희미하다. 너덜지대가 나타나더니, 개척산행마냥 길이 희미해진다. 간간이 보이는 표지기와 사람들이 다닌 미세한 흔적을 좇아 내려서니 흥국사로 이어진 계곡이다. 흥국사는 천년고찰답게 오래된 안정감이 있다. 절 한쪽에 노거수, 살아남은 기품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햇볕을 머금고 있다. 곧 봄이 올 거라 속삭이는 것만 같다. 잔혹한 전설 같은 영취산의 봄이 오고 있다고.
영취산
510m
전남 여수시 월내동ㆍ적량동ㆍ중흥동ㆍ상암동
산행 거리 6.6km
산행 시간 3시간 30분
산행 난이도 중하(439m봉에서 흥국사 하산 시 길찾기 주의해야)
들머리인 진달래축제장 주변엔 건물이나 기점 삼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택시기사들도 ‘진달래축제장’이라고 하면 안다. 자가용 차량으로 갈 경우 내비에 ‘여수시 월내동 547번지’로 주소를 입력하면 된다. 축제장은 평범한 주차장이다. 여기서 산으로 이어진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올라치면 주능선에 닿는다. 가마봉은 전망데크가 있는 첫 번째 암봉이며 별다른 정상 표지석은 없다.
주능선부터는 길이 선명하고 이정표가 있어 길찾기는 쉽다. 정상을 지나 봉우재에서 시루봉 쪽은 등산로 정비가 제대로 안 돼 있고, 이정표 또한 적은 편이다. 시루봉(419m)을 지나면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에 닿고 이어가면 439m봉에 닿는다.
경치는 시루봉이 가장 좋고, 439m봉에는 돌탑과 삼각점이 있다. 439m봉에서 흥국사로 하산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한다. 내리막으로 치닫던 길이 점점 희미해진다. 간간이 붙은 표지기와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따라 고도를 내리면 계곡에 닿는다.
계곡부터는 길이 선명하다. 큰 산이 아니기에 길이 희미해도 계곡을 향해 내려가면 흥국사에 닿으므로, 당황하지 말고 내려서야 한다. 시루봉 이후로는 화려한 볼거리가 없으므로 다시 봉우재로 내려가 계곡을 따라 흥국사로 하산하는 것도 합리적인 산행법이다.
들머리인 월내동 진달래축제장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흥국사는 여수종합버스터미널에서 52번 버스가 70분 간격으로 운행(05:30~21:30)하므로, 대중교통 이용 시 흥국사를 들머리로 봉우재로 올라가는 코스가 합리적이다. 여수시내에서 택시로 진달래축제장을 갈 경우 18km 거리이므로 2만~3만 원 정도 요금이 나온다. 문의 여수콜택시 061-682-0066, 682-1515.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여수까지 30분~1시간(05:30~21:00)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4시간 10분 소요, 요금 3만800원.
숙식(지역번호 061)
여수시내에 식당이 많다. 맛집으로 람바다횟집(686-2401), 칠공주장어탕집(663-1580), 구백식당(662-0900), 갯마을장어집(643-2477), 한정식 한일관(654-0091), 서대회 무침 전문 삼학집(662-0261) 등이 있다.
여수시내에 모텔과 게스트하우스, 호텔 등 숙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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