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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경주 계림

by 白馬 2008. 5. 22.

        [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경주 계림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 서려…신라 천년간 신성시
        왕버들·느티·회화나무 등 100여 그루 고목들 무성

경주는 천년고도의 땅으로 현대는 왜소하고 과거는 돋보이는 특이한 곳이다. 시간이 흐르면 인간은 가고 자연은 남는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였던 계림과 월성의 유적과 그를 둘러싼 고목, 대능원과 오릉의 솔숲에서는 역사의 블랙홀이 우리를 빨아들인다. 신라의 박(朴), 석(昔), 김(金) 세 왕족과 관련된 유적과 더불어 고목의 숲을 감상할 수 있다. 억겁을 찰나로 보여주는 고목의 연륜에 외경을 느낄 수 있다. 그 공간을 스쳐간 흔적 없는 군상들이 바로 현재의 우리가 아닐까?


▲ 계림의 초봄.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목숲이다. 오른쪽에 내물왕릉이 있고 뒤에는 반월성이 조금 보인다.

땅에 나무들이 자라면 숲으로 진화한다. 그 숲에 사람이 깃들어 있다. 사람은 땅에 흔적을 남긴다. 사람들을 감싸안았던 나무들이 사람의 흔적을 간직한다. 나무가 사람의 흔적이다. 사람에 의해 나무가 심겨지고 길러진다. 나무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의 지형에 맞춰 가지를 벌리고 오므리며, 기후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사람의 손을 타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 꺾이고 뒤틀린다. 나무의 형상에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을 읽을 수 있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고도다. 아무 곳이나 땅을 파면 어김없이 역사의 편린들이 출토되는 그런 땅이다. 눈을 들면 집보다 높은 고분들이 즐비하여 경주가 고도임을 말해준다. 도처에 왕릉들이 우뚝 서 있고, 곳곳에 오래된 유적들이 많다. 그들 옆에는 항상 고목들이 수호천사를 자처하고 있다. 유적지가 가까운 곳에서는 모두가 단층집이다. 고층빌딩이 눈에 익은 현대인으로서는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마치 먼 나라의 고대도시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현대는 되레 왜소하고 고대인들의 흔적이 한층 돋보이는 특이한 곳이다. 이번에는 고대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경주의 숲을 만나러 간다.


▲ 미추왕릉에 있는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경주에 내리면 멀지 않는 곳에 경주 동부 사적지대(사적 제161호)가 있다. 이는 동서로 안압지에서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를 잇는 광대한 구역이다. 신라 왕경(王京)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월성, 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 중요한 사적과 숲이 많다. 내물왕(奈勿王)을 비롯한 수십 기의 완전한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경주에서도 신라의 옛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터미널 옆이나 대능원(大陵苑) 정문쪽에서 자전거를 빌리면 주변의 유적들과 숲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신라의 박, 석, 김 세 왕족과 관련된 유적과 더불어 고목의 숲을 감상할 수 있다. 외곽에 더 많은 유적지가 산재하고 고목의 숲들이 다양하지만 계림을 중심으로 주변의 숲을 돌아보는 것이 경주 숲의 백미일 것이다.

대능원 안에 천마도(天馬圖·국보 제207호)가 출토된 천마총(天馬塚)이 있다. 천마도는 말다래[障泥]에 그린 장식화로 붉은 색으로 채색한 자작나무 껍질에 흰 색의 천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모양을 그린 신라시대의 그림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울창한 해송숲이 방문객을 반긴다. 수피가 검어서인지 그늘도 어둡다. 산책로를 따라 해송터널을 빠져나오면 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이 나타난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혼자만 담을 두르고 있다. 수양버들과 느티나무들도 간간이 보이고 벚나무, 산수유,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늘어선 배롱나무들이 미끈한 피부를 자랑하고 있다. 능들은 깔끔하게 처리된 부드러운 곡선으로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며 왜소한 현대인들을 압도하듯 도열해 있다. 어떤 능은 대나무가 자라나 반쯤 덮어 마치 저 혼자 속인인양 더벅머리를 하고 있다. 빽빽한 대숲에서 봄맞이 짝짓기에 열중하느라 조잘거리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 1 대능원 해송. 대릉원에는 해송이 주종이다. 2 계림. 심하게 뒤틀린 수형과 옹이, 이끼 낀 수피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3 계림. 빈사상태의 고목들이 인공발포제로 외과수술을 받은 모양.
대능원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해송 그늘을 빠져나온다. 정문에서 보면 앞의 사적지에 건물 하나 없이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 주춧돌이 점점이 박혀있다. 멀리 왕릉이 몇 기 모여 있으며, 그 옆에는 범상치 않은 넓은 고목숲이 보인다. 뒤에는 월성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따라 천천히 계림으로 향한다. 도중에 우뚝 솟은 첨성대(瞻星臺)를 본다. 첨성대는 선덕여왕(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기구다.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거의 원형을 간직한 귀중한 문화재다.

계림(鷄林)은 신라 건국 초부터 있던 숲으로, 신라 왕성(王姓)인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으며, 신라 천년동안 신성한 숲으로 여겨왔다. 처음에는 시림(始林)으로 불리다가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으며, 계림은 후에 나라이름으로도 불렸다. 순조 3년(1803)에 세운 기념비가 남아있으며,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됐다. 알지의 ‘알’은 금(金)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 붙이는 존칭어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도 한다.
 
주름진 수피·옹이서 세월의 무게 느껴
계림은 7,273㎡의 면적에 왕버들, 느티나무, 회화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단풍나무 등 100여 그루의 고목들이 무성하게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며 잘 보존돼 있다. 몇 백 년을 묵은 세월의 깊이가 물씬 풍겨나는 주름진 수피와 옹이, 꺾이고 뒤틀린 수형과 굽어 넘어진 수간에서 다시 가지가 고개를 드는 자세가 경외감과 신비감을 더한다. 우람한 거구에 춤추듯 구불구불하게 긴 팔을 뻗어 올린 높은 곳에는 무수히 많은 잔가지가 하늘을 덮고 있어 왕성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새로 심은 미끈한 새내기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 1 반월성.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는 성곽을 따라 송림이 우거져 있다. 2 반월성. 넓는 궁터 외곽에 석빙고가 보인다. 3 반월성. 시골 아낙네가 햇볕을 피해 성곽의 숲길을 걷고 있다.

어떤 나무는 외과수술로 잘려진 몸통 전체가 인공발포제로 싸여 가지가 난 것도 있고, 아예 생명을 다하여 등나무의 지지대가 된 것도 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나무를 쪼아대던 딱따구리가 외과수술한 부분조차도 쪼아서 구멍을 낸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수염을 뽑아대는 얄미운 손주 같은 놈이다.

꿈틀거리는 근육을 자랑하며 요상한 포즈를 취하는 보디빌더 같은 고목들이 위압적인 높이로 하늘을 덮고 있지만 바닥은 널찍하고 시야가 틘다. 멀리 고분들이 가랑이에 걸려있다. 이른 봄의 상춘객이 많지 않아 주위가 조용하다. 느릿하게 숲을 걸어본다. 이 공간을 관통한 천 년의 시간이 있고, 또 그만한 시간이 비껴갔다. 이 나무들은 후손에 후손을 이은 뿌리가 오늘에 이른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 사람은 밀려나고 나무들은 건재하다. 오늘의 우리는 다만 그 숨결만 느낄 뿐이다. 쪼르르 지나가는 다람쥐 한 마리가 상념을 깬다.

계림을 나와서 월성(月城)에 오른다. 신라의 세 번째 궁성으로 평지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솟은 터에 궁성을 지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부른다. 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토함산에 올라 살펴보니 좋은 봉우리 하나가 있어 잔꾀를 부려 이미 살고 있던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는다. 2대 남해왕은 탈해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맏공주 아니(阿尼)로 사위로 삼았다. 서기 57년에 탈해가 4대왕으로 등극하고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 1 반월성. 남쪽에 송림이 울창하고 그 뒤로 빽빽한 대숲이 보인다. 2 반월성. 북쪽의 소나무들은 용비늘이 선명한 몸매를 과시한다. 3 반월성. 남동쪽에는 참나무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4 계림. 딱따구리는 인공발포제에도 구멍을 뚫는다.


인간은 사라지지만 숲은 살아있어

반월성의 성벽은 허물어진 돌무더기들만 보이고 그 아래에는 유적조사차 잔뜩 파헤쳐 놓아 ‘황성옛터’를 연상케 한다. 널찍한 성터 한쪽에 아줌마부대의 계모임이 왁자지껄하게 열리고, 연인들은 숲속에서 밀어를 나누거나 돗자리를 깔고 정답게 봄 햇살을 즐기기도 한다. 어린 남녀 친구들은 오붓이 거닐다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둘의 사진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배낭을 멘 아저씨들은 성터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돈다.

가운데는 평지로 궁궐터는 몇 개의 주춧돌만 남아있고 성벽터에는 사방으로 나무들이 울창하다. 반월성의 가장자리는 솟은 봉우리와 꺼진 골짜기, 돌무더기와 평탄한 흙길이 혼재하며, 제법 긴 거리와 다양한 수종의 고목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여느 숲길과 다를 바 없다. 소나무와 참나무, 느티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북쪽 사면에는 벚나무 일색이다. 간간이 수양버들이 파릇한 기운을 드리우고 남쪽 사면에서 대숲이 서걱대는 소리를 낸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석빙고(石氷庫)가 나오고, 한 바퀴 돌면 안압지(雁鴨池)가 있다. 저 멀리 황룡사지(皇龍寺址), 분황사(芬皇寺) 등이 보인다. 남쪽으로 돌면 바로 아래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 고개를 들면 울창한 숲 위로 고개를 내민 남산이 남기(嵐氣)에 싸여 파르스름하게 실루엣만 보인다.

입구에 묶어둔 자전거를 타고 안압지, 황룡사지, 분황사를 돌아 국립경주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릉으로 향한다. 이 길은 자전거도로가 따로 없으나 샛길이라 다니는 차들이 별로 없다. 남천(南川)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릉이 나온다. 오릉(五陵)은 사적 제172호로 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의 다섯 개의 능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 부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 5명의 분묘라 전한다. 혁거세 왕이 재위 62년 만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도 따라 승하했다. 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다고 해서 오릉 또는 사릉(蛇陵)이라 한다. 숭덕전 앞의 홍살문이 당간지주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담암사의 유물로 전한다. 영조 35년(1759)에 세운 신도비와 알영 왕비의 탄생지인 알영정터가 있다. 오릉을 둘러싼 울창한 숲은 소나무가 주종이다. 넓은 솔밭길을 걸으며 하염없이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경주의 숲에서는 다양한 수종을 보는 것보다 긴 시간의 흐름을 호흡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인간은 가고 자연은 살아있다. 천년의 시간이 빠져나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어도 그들을 둘러쌌던 숲 공간은 그들의 숨결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억겁을 찰나로 보여주는 고목의 연륜에 외경을 느낀다. 그 공간을 스쳐간 흔적 없는 군상들을 생각하면 그 구체적 자취가 바로 현재의 우리들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경주 계림 가는 길
 
버스는 경주까지 4시간 정도 걸리고, 동서울터미널(30~60분 간격, 07:00~24:00)과 서울고속버스터미널(15~50분 간격, 06:05~23:55)에서 탈 수 있다.

KTX는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요금 41,100원) 가서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로 환승하면(요금 2,600~3,900원) 경주역까지 총 3시간10분 소요된다.

자가용은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나 영동고속도로, 또는 중부고속도로로 가다가 여주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갈아타고, 감곡-충주-상주-김천 분기점(경부고속도로)-구미-왜관-북대구-경산-영천-경주 나들목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며, 3시간 반~4시간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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