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은둔의 땅 영월
섶다리 아래 단종의 눈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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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寧越)은 지명처럼 ‘편안히 넘어가는’ 고장이 아니었다. 옴팡 들어간 분지 형태인 이 땅에 닿으려면 첩첩이 가로막는 산들을 뚫어야 했다. 복작거리는 거대 도시 서울에서 오지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 길었고, 그 끝에선 유배·은둔·피란의 역사가 봄볕을 쬐며 슬픔을 말리고 있었다. 이번 주 주말매거진은 영월로 가 단종(1441~1457), 김삿갓(1807~1863), 고씨동굴을 만났다. 물속, 산속, 땅속을 훑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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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감옥 청령포
역사 안으로 몸을 밀어넣으려면 내 삶을 정지시켜야 한다. 처음 차를 세운 곳은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 지름 50~60㎝의 푸른 소나무들은 능쪽으로 절을 하듯 몸을 굽혔고, 이들이 호위하는 길 끝에 오롯이 솟은 능은 고요해서 애잔하다. 거뭇거뭇 세월을 이고 있는 석물들을 뒤로하고 단종역사관 쪽으로 내려오는데 딱따구리 한 마리가 소나무를 쪼아 댄다. 능을 통째로 일으켜 세울 듯한 이 소리에 온몸의 세포들이 바짝 긴장한다.
물의 감옥, 청령포는 장릉에서 차로 5분 거리. 단종은 서강이 삼면을 돌아 흐르고 나머지 한쪽도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로막힌 이 유배지에서 1457년 여름 두 달을 나고, 늦장마에 강 건너 관풍헌으로 이송됐다가 음력 10월 24일 사약을 받는다. 500년이 지나 관광지가 된 청령포에는 50명까지 태울 수 있다는 동력선이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 준다.
도선료 포함해 1300원이면 1분 만에 청령포를 밟을 수 있다. 자갈밭과 갈대밭을 지나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소나무숲이 펼쳐지고 단종 어가가 나온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파란 비단옷을 입고 독서 중인 단종(밀랍인형)의 침실에선 강 건너 동쪽 수풀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하루 종일 강물 소리가 차오르는 방은 뗏목 하나 크기였다.
인형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이강백의 희곡 ‘영월행 일기’가 그 표정 위로 포개졌다. 작가는 세조 3년인 1457년 신숙주의 하인이 영월을 오가며 썼으리라는 가상의 일기를 통해 삶을 통찰한다. 서울에서 400리가 족히 넘는 길을 세 번이나 왕복한 그 하인에 따르면, 유폐당한 노산군(단종을 낮춘 이름)의 얼굴은 무표정으로 출발해 슬픈 표정, 기쁜 표정으로 변주된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가 참지 못하고 사약을 내린 건 기쁜 표정 때문이었다고 상상하는 작가는 “살아남고 싶다면 죽을 듯 슬퍼하든지 표정을 드러내지 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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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의 관음송(觀音松)은 과연 수령 600년이 넘도록 무표정으로 여일하다. 1000여 그루의 소나무들 한가운데 우뚝 선 높이 50m, 줄기 둘레 5m의 관음송엔 단종이 이 나무에 올라 시름에 잠기곤 했다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왕비를 그리며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 강 건너 세상을 보러 오르곤 했다는 노산대에서도 열여섯 살 단종의 비애가 묻어났다. 백성들의 출입을 막으려고 영조 2년(1726)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에는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이라고 적혀 있다. 단종은 발이 묶여 더 많은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청령포 주차장에서 들른 화장실에는 ‘욕심을 버리는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는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1050m) 자락에 있다. 청령포에서 차를 달려 30분. 김삿갓으로 이름난 난고 김병연의 묘와 집터, 삿갓 모양의 지붕을 얹은 문학관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영월은 ‘정감록’에 등장하는 좋은 피란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 세상 어떤 난리통에도 화가 미치지 않을 만큼 안전한 은신처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할아버지 김익순이 대역죄인으로 몰리자, 김병연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피하다 1816년 영월로 들어와 화전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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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녘에 본 방랑시인의 묘는 쓸쓸히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저녁 노을을 보고 술 생각이 간절해 읊었다는 “천 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돌다 보니/…/황혼에 술집 앞에 이르니 어찌할거나” 등 그가 남긴 시들과 돌탑들이 묘역을 지킨다. 스무 살 때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조부를 비난하는 시로 장원을 한 김병연은 죄를 통탄하며 1828년 산을 내려왔다. 죽어서야 끝나는 34년 방랑길의 시작이었다.
김삿갓이 화전민으로 살던 마대산 중턱까지, 어둑해지는 산길을 올랐다. 청령포가 물로 지어진 감옥이라면 여긴 산으로 둘러쳐진 은신처다. 돌길과 옆으로 난 계곡은 나란히 이어지다 불쑥불쑥 몸을 섞었다. 물은 저렇게 길을 점령하며 은둔자의 발자국과 두려움을 지웠으리라. 길이 물에 잠길 때마다 나는 돌을 밟고 물길을 건너느라 온 신경을 발로 모아야 했다. 계곡엔 얼음장이 보이고 산속은 아직 겨울이다.
물처럼 아무 이름 없이 세상을 떠도는 것. 한 자리에 숨는 것보다 더 깊은 은둔이다. 산길 1.5㎞를 30분쯤 오른 끝에 나타난 김삿갓의 집은 남루했다. 담은 없었다. 계곡물 소리가 밀려들어와 해가 떨어진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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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피란지 고씨동굴
이튿날 아침 다시 고씨동굴로 흘러갔다. 깊이 들어가려면 몸을 낮춰야 했다. 땅속 여행에서 배운 공부다. 하동면 진별리에 있는 고씨동굴엔 임진왜란 당시 고씨 일가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왜군을 피했다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영월은 고씨, 신씨, 엄씨의 집성촌. 입김이 보일 만큼 서늘한 동굴을 100m쯤 들어가자 고씨 가족이 몸을 숨겼던 공간이 나왔다. 한쪽 벽엔 불에 검게 그을린 흔적도 있다.
청령포 앞 서강을 건너며, 김삿갓이 걷던 길을 되밟으며, 고씨동굴의 좁은 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몸과 세상의 단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역사로 남아 세상을 끈끈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겨울의 끝과 봄의 처음이 겹쳐지고 있는 영월의 역사여행. 나머지는 빈칸이다. 첨벙! 영월로 몸을 던질 당신을 위해.
◆ 여행수첩
●가는 길
서울 등 수도권에서 2~3시간이면 영월에 닿는다. 영동고속도로를 타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옮겨 탄 후, 신림IC에서 88번 지방도로 나오거나 제천 나들목에서 38번 국도로 빠지면 된다.
●이것만은 조심
구불구불한 휘어지는 산길 운전도 위험하지만 특히 낙석을 조심할 것. 김삿갓 유적지에서 돌아오는 밤길엔 낙석을 피해 운전하느라 진땀이 났다. 관광객이 몰리는 7~8월 성수기에 고씨동굴을 보려면 예매가 필수. 입구와 출구가 같아 하루 입장 인원을 2200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예매를 해도 서너 시간씩 기다려야 할 정도니, 오후에 아무 대책 없이 고씨동굴에 갔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다.
●묵을 곳
최근 지은 모텔로는 터미널을 끼고 있는 코리아파크(033-372-2972)와 동강 쪽이라 전망이 좋은 테마모텔(033-373-1227)이 유명하다. 펜션은 어라연 쪽에 많다. 어라연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동강힐하우스(033-375-1777)는 동굴바위가 보이는 등 전망이 수려하다. 그 밖에 장급 여관과 펜션 등의 숙박정보는 영월군 문화관광 사이트(ywtour.com/kor)에서 검색할 수 있다.
●문의
영월군 문화관광 사이트에는 숙박뿐 아니라 영월을 여행하는 데 요긴한 정보가 꼼꼼히 실려 있다. 페이지 구성도 깔끔해 훑어보기 쉽다. 영월군청 문화관광과(033-370-2542)에 전화해도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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