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세 번째 장마를 맞았다. 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올해는 유독 꿉꿉하고 바람도 많다. 올여름엔 꼭 차귀도를 가겠노라 벼르고 있던 차였다. 나는 제주의 동쪽에 산다. 차귀도는 서쪽 끝에 있다. 제주에서 가장 먼 길을 나섰다.
사람이 살던 무인도
파릇하던 날씨가 서귀포 하례리를 지날 때쯤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안개가 몰려와 길을 덮쳤다. 해발 400m, 한라산에 막혀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구름이 중산간까지 하강한 것이다. 여행에도 징크스가 있다. 차귀도에 갈 때마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비가 내렸던 기억이 있다. 차귀도의 징크스인 걸까.
서귀포와 성산을 잇는 서성로는 한라산의 영향으로 날씨의 변화가 잦다
자구네포구는 일요일인데도 평일처럼 한산했다. 날씨 때문이거나 아니면 요즘 제주도를 찾는 여행객이 급격히 줄어든 탓일 거다. 이곳의 명물이라는 반건조 오징어도 찾는 이가 없었다. 이미 꾸덕꾸덕하게 건조되고도 남았을 텐데, 빼곡히 걸린 채 바닷바람만 하염없이 맞고 있다.
자구네포구와 차귀도는 자귀나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차귀도는 면적 0.16km2의 조그마한 섬이지만, 한편으로는 제주도가 품은 59개 무인도 중에서 가장 크다. 오래전, 차귀도에는 사람이 살았다. 자구네포구에서 본 섬까지 1km밖에 되지 않으니 입지상 당연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당되는 얘기다. 추자도 간첩 사건 이후, 안보라는 미명 하에 몇 안 되는 주민들조차 강제로 섬을 등져야 했고, 차귀도는 오롯이 자연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차귀도는 죽도, 와도, 지실이섬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와도는 ‘누운 섬’이란 뜻으로 자구네포구 가까이 있다. 지도에서 보면 완전한 Y자 모양에다 깊숙이 만입된 해안선이 절묘하다. 한 번쯤 배에서 내려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만, 아쉽게도 유람선은 와도에는 기항하지 않는다.
지실이섬은 비상하는 독수리를 닮았다
한편 지실이섬의 ‘지실(지슬)’은 감자의 제주 방언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독수리 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옆에서 보면 날개를 곧추세운 독수리가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한 모습이다.
제주도 해안가에 걸린 오징어는 아쉽게도 대부분 수입산이다
인공조차 자연으로 남은 시간
자구네포구를 출발한 유람선은 20분 후 차귀도의 본섬 죽도에 도착했다. 넉넉잡아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너울로 인해 멀리 돌아오느라 두 배가 소요된 셈이다. 죽도는 차귀도의 어미 섬으로 동서 길이가 850m, 남북이 300m로 둘레가 모두 해안절벽으로 싸여 있다.
탐방객들은 ‘흔적의 창가’에 걸터앉아 세월의 무상함에 빠져 보기도 한다
선착장에서 섬 능선까지는 돌계단만 오르면 끝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벽과 창틀만 남은 폐건물이다. 과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기도 하다. 까마득한 옛날 영화 <외인구단>의 지옥 훈련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시간은 인공의 구조물조차 자연이 될 만큼 충분히 흘렀다. 사람들이 떠난 지 50년, 영화가 개봉한 지도 어언 40년이나 됐으니 말이다. 애틋함에 멈췄던 시선과 발걸음을 다시금 돌리자 광활한 분지가 펼쳐졌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그래도 초록빛이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차귀도는 2000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일반에 공개된 지도 채 15년이 안 됐다.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앞장서서 받는 지역으로 생태환경은 아열대성에 가깝다.
차귀도 탐방로는 섬 둘레를 한 바퀴 돌아오는 순환 코스다
탐방로는 4.1km, 섬 둘레를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다. 탄성이 연사로 이어질 만큼 길은 환상적이다. 초원 위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곧장 바다로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탐방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시계방향으로 걷는다. 해안가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시스택은 첫 번째 전망대의 주인공이다. 이름하여 ‘바위’, 신화에 의하면 제주도를 만들었던 설문대 할망 500명의 아들 중 막내다. 나머지 499명의 형은 한라산 영실의 오백 장군이 되었으니 함께 못한 사연이 깊다.
제주 본토를 감상하며
차귀도등대는 1957년에 세워졌다. 인근 고산리 주민들이 돌을 짊어지고 건너와 직접 지은 것이다. 등대가 세워진 볼록한 땅을 사람들은 볼래기 언덕이라 부른다. 몹시 힘이 들어 숨이 차오르고 곧 죽을 것만 같을 때 제주에선 ‘볼락볼락’이란 말을 쓰는데, 그것에서 파생됐다.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가히 짐작 가는 이름이다.
섬의 동쪽 볼래기 언덕에 서 있는 차귀도등대는 70년의 연륜을 자랑한다
그런 등대는 한편으로는 섬 최고의 인증숏 포인트다. 평소 단독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지만, 최근엔 탐방객이 줄어들어 웨이팅도 짧아졌다.
등대의 반대쪽 봉우리는 섬의 정상이다. 그래 봤자 해발 67m에 불과하지만. 꼭대기에는 큼지막한 데크가 놓여 있다. 난간이 없으니 시야에 걸리적거림이 없어 좋다. 용수리와 자구네포구 그리고 당산봉까지, 섬에서 제주 본토를 감상하는 기분 또한 각별하다. 차귀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약 1시간, 한가하게 앉아서 멍때릴 겨를은 없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걷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 기억으로 옮겨 담을 시간이다.
자구네포구에서 캠핑하며 차귀도 해넘이를 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가는 유람선에서는 차귀도의 해안 비경을 바다에서 감상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번은 포구로 직행이다. 궂은 날씨가 지실이섬과의 재회를 막았다. 슬그머니 섭섭함이 몰려온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 한 번 더 올까?
▶TRAVEL SPOTS
차귀도로 향하는 길
차귀도 유람선
자차로 이동할 경우 내비게이션에서 차귀도, 고산항(자구네포구), 차귀도유람선을 검색하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제주공항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고산환승정류장에서 내려 25분 정도 걸어야 한다. 차귀도 탐방을 위한 배편 티켓의 요금은 현장 매표의 경우 성인 기준 왕복 1만8,000원이다. 인터넷 예매시엔 3,000원이, 전화 예약 후 현금 입금시엔 4,000원이 할인된다. 차귀도로 가려면 ‘차귀도선셋유람선’과, ‘차귀도유람선’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참고로 ‘차귀도선셋유람선’은 배가 좀 더 크고 마을에서 운영한다.
화산퇴적 지형의 전시장
수월봉 지질트레일
차귀도는 제주 수월봉 지질트레일 C코스에 해당한다. 차귀도에서 나와 수월봉 탐방을 함께 이어 가면 하루가 더욱 뿌듯해진다. 수월봉은 1만4,000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됐고 그 자취는 오름과 주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수월봉 초입에서 자구네포구로 이어지는 1km의 해안 길은 화산퇴적 지형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멋진 바다 풍경과 어우러진, 차귀도의 부록과 같은 코스다. 이 길은 ‘엉알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제주 사투리로 ‘벼랑 아래 길’이란 뜻이다.
차귀도 뷰 맛집
카페 데스틸
최근 TV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코드쿤스트가 방문해 화제가 됐던 카페다. 내부의 통창과 루프톱에서 차귀도의 오롯한 모습이 담기는 뷰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코쿤이 마셨다는 오렌지 에스프레소를 포함해 아인슈페너와 고래 모양의 브라우니도 수준급이다. 카페 건물은 2021년 제주자치도 건축문화대상에 선정됐다. 특히 외벽의 대형 벽화는 비영리단체 위세이브오션스(WSO)의 ‘고래 살리기 벽화 공모전’의 최우수 입상작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믿음직스러운 베이커리
미쁜제과
돌고래가 출몰한다는 신도리 해안가로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뜬금없는 한옥 건축물과 마주치게 된다. ‘믿음직스럽다’라는 뜻의 베이커리 카페, 미쁜제과다. 고풍스런 감성의 카페는 6,600여 평방미터의 대형 부지에 위치해 있고, 카페 내부만도 500m2이나 된다. 나무와 연못 그리고 분수로 조성된 정원도 있다. 미쁜제과의 모든 빵은 유기농 밀가루를 자연 숙성해서 만든다. 천연 발효종 소금빵, 마약빵, 옛날 팥빵 등이 유명하지만, 카야 바게트나 앙버터의 맛도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