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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무심한 듯 정겹고, 심심한 듯 생각나는 감자옹심이

by 白馬 2024. 1. 13.

감자옹심이

 

서울 용산구 박명도봉평메밀막국수 감자옹심이와 수육.

 

눈이 쌓인 영동 고속도로는 두 발로 걷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강원도 정선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겨울 해는 빨리 졌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이는 눈 더미가 양쪽에 펼쳐져 있었다. 20년 전쯤이었다. 눈길을 한참 달리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기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눈길 달리기 무섭지 않아요?” 그 말에 기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눈이 내리면 미끄러져서 달리기 더 쉽지요.” 깜깜한 창밖을 보며 그 대화를 듣다 보니 내가 강원도라는 곳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의문이 들었다.

 

산 위에 산이 있는 강원도의 맛이란 원래 화려하지 않았다. 물산이 많이 모이던 남도 지방에 비해 강원도 음식이란 황토처럼 질박하고 격이 없다. 그 강원도의 맛을 찾아 간 곳은 원효로의 ‘박명도봉평메밀막국수’’라는 집이었다. 길 한편에 불쑥 솟아난 장승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이 집은 점심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막국수집이지만 겨울이면 김치찌개 같은 뜨거운 음식을 따로 메뉴에 올린다. 눈발이 휘날리던 저녁이었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변에는 모두 버너에 커다란 냄비를 올리고 김치찌개를 끓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먹지 않아도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신맛과 매운맛에 침이 입안에 고였다. 굳이 따지자면 막국수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냉장고도 없던 옛날에는 겨울에 동치미나 김칫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것이 당연했다.

 

김치찌개의 유혹을 뿌리치고 막국수를 시켰다. 면 뽑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 위에 들기름 막국수가 오르자마자 ‘다르다’는 느낌이 왔다. 들기름 맛을 칭찬하며 슬쩍 물으니 강원도 말투가 묻어나는 주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들기름은 강원도 횡성에서 토종으로만 골라 직접 짜낸다고 했다. 그것도 1년에 15가마니가 전부, 그때 짠 기름을 다 쓰면 가을 추수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김가루, 들깨가루가 눈 내린 것처럼 흩뿌려진 막국수에는 참기름과 달리 내성적인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숲속에 들어온 듯 밀도 높게 퍼졌다.

 

쇠젓가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면을 들었다. 손에 얹히는 감각이 매끄럽고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국수를 훌훌 말아먹는다는 그 말 그대로 뻑뻑하지 않고 부드럽게 젓가락이 움직였다. 젓가락에 걸린 면은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면은 거칠거나 굵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가루 면처럼 쫄깃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끊기고 그러면서도 가늘고 찰기가 있는 면발은 넉넉히 친 들기름으로 코팅이 되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에는 이로 꽉 깨물어 잡지 않으면 뿜어져나갈 것처럼 생생한 기세가 있었다.

 

멸치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한 물막국수는 옛날 눈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에도 왜 이런 찬 국수를 먹었는지 이해가 되는 맛을 지녔다. 명치 언저리까지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은 어른으로 살아가며 쌓일 수밖에 없는 화, 짜증, 불안 같은 그 모든 것을 씻어 말끔히 내려버렸다. 명태식혜와 함께 오른 수육은 겨울의 한복판을 잘라 내온 듯 맛이 깔끔하고 잡티가 없었다. 좁쌀로 밥을 지어 새큼하게 삭힌 명태식혜를 올리고, 간장을 빼지 않은 막장을 얹고, 도라지 무침과 백김치를 엇박자로 섞어 먹었다.

 

하얀 김을 내며 상에 오른 감자옹심이는 한 숟가락 뜨자마자 신음도 탄성도 아닌 무언(無言)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자 전분이 스며든 국물은 고구마나 옥수수 전분이 섞인 국물과 다른 물성, 그러니까 한 방울 한 방울 크게 맺히며 국물이 떨어지되 끈적거리지 않는 오묘한 점도를 가지고 있었다. 껍질을 벗긴 들깨로 가루를 내어 우려낸 국물은 다른 건더기 없이 오직 옹심이만 하얗게 배를 내밀고 떠 있었다. 직접 빚은 옹심이는 과하지 않게 쫄깃거렸다. 또 한편으로는 눈을 씹는 것처럼 서걱거려서 한입 씹어 삼킬 때마다 눈밭을 걷는 듯 소리가 났다. 음식 하나하나 무심한 듯하면서도 정겹고, 맛이 심심하다 싶으면서도 뒤돌아서면 생각이 나서 산 뒤에 산이 버티고 선 것처럼 맛 뒤에 또 다른 맛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강원도 정선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눈길을 미끄러지듯 달리던 시외버스 운전기사는 자정 근처에 도착한 나를 위해 숙소를 직접 찾아주고 나서야 퇴근을 했다. 그리고 나는 여행 내내 집반찬을 올린 밥상을 식당에서 받고 그 끼니를 마치고 나면 신작로 한편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젊은 부부를 보았다. 흔하여 잊히기 쉬운 것들, 화려하고 거대한 것에 가려진 잔잔한 시간들, 그것들을 찾아 높은 산어귀 볕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웃으며 사는 꿈, 감자 옹심이를 닮은 소박한 그 마음이 강원도의 맛 아니었을까?

 

#박명도봉평메밀막국수: 옹심이 1만2000원, 막국수 1만1000원, 수육 중 3만원, (02)-717-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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