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 버스
북한산을 싸고도는 북한산로엔 차량도 정류장도 드물다
34번 버스에 대한 고마움을 한 번쯤은 표시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명진여객 소속 34번 버스는 불광역과 의정부를 오가는 경기도 버스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구파발역을 헤치고 나와 34번 버스를 탄다. 북한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이다. 단조롭게 이어진 도로를 거쳐 34번 버스가 북한산성 입구 정류장에 멈추면 그 많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내린다. 홀쭉해진 버스는 무언가 어색한 듯, 조금은 외로운 듯 송추와 의정부를 향해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연꽃 만나고 가는 길일까?
서울의 북부 지역에 사는 나는 34번 버스 이용 행태가 뭇 사람들과 다르다.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34번 버스를 타는 게 아니라, 하산 후 귀가를 위해 34번 버스를 탄다. 의정부를 거쳐 집에 돌아가기 위해 34번을 탄다.
습관처럼 주말 새벽이면 나는 우이동 도선사 입구나 화계사 아니면 정릉을 통해 북한산에 들고, 점심 조금 못미처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온다. 고양시의 덕양구와 서울시의 은평구가 만나 경계를 만드는 곳이다. 그곳에 34번 버스 정류장이 있다.
시작의 설렘을 안고 타는 버스와 산행을 마무리하기 위해 타는 버스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을 구분했다. 산행의 기점에서 타는 34번 버스와 산행의 끝에 타는 34번 버스는 전혀 다른 버스다. 내가 타는 34번 버스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34번 버스를 만나기까지 새벽~점심의 5~6시간 동안 나는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드나든다. 어느 날은 백운대를 올랐다가 북한산성 주능선을 따라 대동문까지 걸은 뒤 계곡을 통해 내려온다. 정릉을 통해 올라간 날은 대성문과 청수동 암문을 거쳐 의상 능선을 타기도 한다. 어디로든 효자동(덕양구)과 진관동(은평구), 두 동네가 만나는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면 34번 버스가 나를 기다린다. 아니 내가 34번 버스를 기다린다.
34번 버스는 드물게 배차된다. 언젠가 정류장에 비치된 안내판을 보니, 대개 1시간에 한 번꼴 배차다. 실제 기다리는 시간이야 들쭉날쭉 불규칙하다. 어느 날엔 5분 만에도 나타나고, 다른 날엔 30~40분 기다려야 귀한 존재를 드러내준다. 어느 쪽이어도 괜찮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세월 탓일까, 세월 덕일까. 하염없는 기다림이 싫지 않다. 몸을 이리저리 틀며 산행으로 긴장한 근육들을 풀어주기도 하고, 늦은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객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배낭 깊숙이 넣어두었던 작은 판형의 얇은 에세이를 펼쳐 읽기도 한다. 기다림에 익숙해진 내가 가끔은 대견하고 가끔은 서글프다.
북한산을 싸고도는 북한산로엔 차량도 정류장도 드물다
숨은벽과 우이령의 추억
기다림 끝에 34번 버스에 오르면 나는 대개 차량 후미의 오른편에 앉는다. 정면을 볼 때 기준으로 오른편이다. 흔들리는 34번 버스에 몸을 위탁하고 송추 부근을 통과할 때까지 내겐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린다. 34번 버스가 서는 정류장들 중엔 북한산과 도봉산을 오르는 매력적 산행의 들머리들이 여럿이다. 몇몇 정류장들을 지나치며 나는 오래 전의 산행들을 추억해 보기도 한다.
자연과 절연한 도시는 디스토피아에서 멀지 않다. 영화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좀비 친화형 도시’들은 그저 상상 속의 일일까. 숱한 도시들이 위태로운 상태로 인공호흡을 기다린다.
#효자2통 정류장
숨은벽으로 향하는 산행의 들머리다. 버스에서 내리면 밤골 매표소가 멀지 않다. 아찔한 능선에 잠깐씩 합류하며 진행하는 산행은 늦가을 날씨처럼 소슬하다. 백운대를 배경으로 엎드린 듯 솟은 숨은벽의 절경이야 많은 이들이 전하는 대로다. 그런데 왜 효자2동이 아니라 효자2통일까.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 정류장
우이령을 넘어 우이동으로 한가한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우이령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한가하게 갈라준다. 서울과 경기도를 관통하며 이어주는 이 길이 군사적 요충일 것은 불 보듯 확실하다. 요즘에도 예약을 해야만 출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송추계곡·느티나무 정류장
도봉산 산행의 들머리다. 여성봉과 오봉을 거친 후 도봉산 주능선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면 신선대에 오르고 자운봉을 곁에 둘 수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걸으면 우이암 조금 못미친 전망대에서 도봉산 봉우리들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풍경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멀리 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상.
외로움을 태운 새벽 버스
송추를 지난 34번 버스는 다시 의정부를 향한다. 버스의 궤적이 궁금해 노선이 표시된 지도를 찾아보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을 한데 이르는 북한산국립공원은 서울 북부의 북서 사면을 호위하는 모양새로 높고 유장하게 솟아 있다. 34번 버스는 시발점인 불광에서 종착지인 의정부에 이르는 동안 북한산국립공원의 바깥 경계(서울 기준으로)를 내내 감싸며 운행한다. 북한산 외곽으로 몸을 바짝 붙인 채, 새벽부터 밤까지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몇 번이고 왕복하는 것이다.
황급히 다가온 34번 버스를 탈 때, 또 흔들리듯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볼 때 나는 때로 극심한 외로움에 사무친다. 서울 중심부의 시내버스처럼 5~10분 간격으로 쏟아내듯 자신을 드러내고 또 나타낸다면 그렇게 외롭지 않을 게다. 사람도 차도 별로 없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바깥 경계를 종일 감싸는 34번 버스는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격리하려는 것처럼, 앞서간 34번 버스를 멀리 하고 뒤따르는 34번 버스를 떼놓는다.
백운대 어느 구석에서 홀로 외로운 소나무처럼, 선인봉의 어느 절벽을 배회하는 매 한 마리처럼, 34번 버스는 아직 깜깜한 새벽과 이미 어둑한 저녁을 침묵으로 달려간다. 간헐적 배차만큼이나 드물게 북한산로에 세워진 신호등들만이 끔뻑거리는 눈으로 34번 버스의 외로운 운행을 잠깐씩 세우고 벗해줄 뿐이다. 주말의 짧은 등산을 마치고 34번 버스를 타는 시간은 계절과 무관하게 환한 시간인데도, 나는 가끔씩 이 외로운 버스 안에서 어둠의 하얀 바닥을 느낀다.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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