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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산줌마가 간다] "암이 가르쳐 준 교훈, 하고 싶은건 내일 미루지말자"

by 白馬 2023. 3. 29.

난치병 극복하고 히말라야 트레킹 부산 오서영씨

 

부산에 사는 공무원 오서영씨. 그녀는 일주일 한 번, 퇴근 후 야간등산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간다.

 

편견은 때때로 액젓 같은 것. 생각지 못한 감칠맛의 원료다. 그러니까 편견은 신이 인간의 머리에 심어 놓은 어떤 프로그램이며, 이것을 깬 사람은 아찔한 반전을 맛보게 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편견 없는 삶은 살짝 밋밋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런 편견을 갖고 있다. 부산 사람은 거칠다. 공무원은 차갑고 딱딱하다. 차갑고 딱딱한 사람은 MBTI(성격  유형 테스트) ‘I’ 성향을 갖고 있다. I성향은 꼼꼼하고 계획적이다. 등등. 오서영씨는 ‘까칠’해 보였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스케줄과 관련된 연락을 할 때 카톡을 쓰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답했다. 역시! 부산에 사는 공무원 오서영씨는 까칠하고 철두철미하고 차가운 성격인가? 오서영씨의 이미지를 이런 식으로 그려놓고 보니 살짝 두근댔다. 반전이 있을까?

“벌써 오셨어요? 집 정리가 아직 안 됐는데. 어쨌든 올라오세요.”

그녀의 집은 부산 연제구에 있다. 아파트 32층에 산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어지러웠다. 나와 사진기자는 얼마 동안 헤매다가 버튼을 눌렀다. 한참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가 보였다. 집 밖에 나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그녀는 다급하게 손짓하며 집으로 안내했다. 마룻바닥이 번쩍번쩍 빛났다. 신발 벗고 들어가기가 민망했다. 발자국이 찍힐 것 같았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거실이 나타났다. TV와 소파가 없는 대신 큰 식탁과 책장이 거실 구석을 차지했다. 창문 밖으로 황령산이 코앞이었다. 

“오! 경치 좋네요.” 

나와 사진기자는 감탄했다. 좋은 아파트, ‘마운틴뷰’ 거실. 부산에 사는 건 어떨까? 가장 먼저 묻고 싶었지만 인사치레부터 했다.

 

“산줌마처럼 보이진 않아요, 아이 둘 가진 엄마 같지도 않고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죠”

그녀가 대답했다. 

“저, 1980년 생이에요.”

만으로 42세.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젊음과 늙음의 기준은 뭘까?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외모 때문에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식탁에 앉았다. 식탁 옆에는 외국 어느 도서관에서 본 것 같은 스탠드가 놓였다. 그 옆에는 노트북이 있었고, 옛날식 타자기 모양의 키보드도 눈에 띄었다.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에 관한 애정을 넘어 그것에 웬만큼 익숙한 어느 작가의 작업실 같았다. 그녀가 산을 좋아한다는 건 미리 알았다. 만나기 전에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슬쩍 엿봤는데, 프로필 사진 아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등산과 책, 술과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당당한 자기 소개! 대체 산에 얼마큼 빠져 있는 걸까? 어떻게 살다가 산동네에 왔을까?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질문을 시작했다. 

 

오서영씨가 애용하는 식탁의 구석 자리. 타자기 모양의 키보드가 있고, 외국 도서관에서 쓸 법한 스탠드가 놓였다. 마치 작가의 작업실 같다.

 

공무원의 뜻밖 유랑생활

“고향이 부산인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네, 연산동이오.” 

오서영씨는 부산 ‘특산인’이다. 대학원 졸업 때까지 계속 부산에 살았다. 부산을 떠날 생각이 딱히 없었다. 그녀는 오랜 학교 생활을 끝내고 취직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임용 시험을 준비했는데 뽑는 인원이 적어 일반 공무원으로 목표를 바꿨다. 물론 부산 쪽에서 일할 마음이었다. 얼마간 공부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테스트 삼아 인천 지역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는데, 덜컥 붙어버렸다. 첫 근무지는 인천광역시 교육청.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에 날아가듯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부산을 떠났다. 그것이 슬프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빨리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만 태풍에 휩쓸린 건 아니었다. 남편도 덩달아 그 속에 뛰어들었다. 남편은 학창시절부터 사귀던 부산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인천에 자리잡을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먼저 서울에 직장을 잡았다. 장거리 연애는 못 하겠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천에서 살게 됐고 마침내 결혼했다. 

인천의 작은 아파트에서 둘은 3년 동안 살았다. 그런대로 살만 했다. 어느 날 남편이 하소연했다. 서울까지 왕복 출퇴근이 힘들다는 것, 인천에서 서울로 오가는 ‘지옥철’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사정도 있었지만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메리트’라고 자주 얘기했던 부모님 말도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지방러’ 오서영씨는 화통하게 외쳤다.

“그래, 마, 서울서 살아보자!” 

그녀는 이렇게 외치면서 단번에 서울행을 결정했다. 오서영씨는 서울시교육청에 인사 교류를 신청했다. 운 좋게 그것이 통과됐고 2009년부터 본격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첫 집은 망원동에 있었다. 고통스러운 출퇴근 시간이 줄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집값이 너무 비쌌다. 두 사람의 집은 아파트에서 ‘빌라’로 바뀌었다. 평수도 작아졌다. 신혼 때 구매하고 2년 정도 쓴 가구를 버렸다. 남은 가구들도 집에 욱여넣어야 했다. 첫째가 태어나자 집은 더 좁아졌다.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은평구의 어떤 빌라로 또 이사했다. 여기서도 주거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는 곳이 우범지역은 아니었지만 1층에 자리한 집은 살기에 영 불안했다. ‘세콤’ 같은 방범 시스템을 철저하게 달았다. 세 가족은 복잡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서울살이를 4년 정도 견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오서영씨 혼자 제주도로 여행을 갔는데, 여기라면 사람답게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도 동감했다. 이번에 그녀는 교육부 쪽에 인사 교류 신청을 했고 우연찮게 또 빨리 통과, 제주도로 이사했다.

제주도에서의 초반 2년은 좋았다. 교통체증이 없었고 주변 풍경도 좋았다. 직원 아파트도 그럭저럭 살 만 했다(남편은 여기서 다른 직장을 얻었다). 얼마 후 애월에 있는 빌라로 또 살림을 옮겼지만 그래도 만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답답했다. 확실히 ‘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비, 전기세 등 공공요금이 비쌌고, 물가도 높았다. 집값도 비싸졌다. 모든 비용이 올라갔지만 남편의 월급은 줄었다. 이윽고 제주도에서 평생 살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더 들면 인사 교류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오서영씨 집에 있는 책장. 소설책과 여행책이 반반이다. 국립공원 캐릭터 인형이 눈에 띈다.

 

다시 부산으로

오서영씨가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온 해는 2020년. 부산행을 결심한 이유는 이렇다.

“제주도에서 평생 살 수 있을까? 제 자신에게 물어보면 선뜻 답할 수 없었어요. 뭔가가 부족했죠. 결국 ‘그건 아니다’라고 결정했고, 부산으로 인사 교류 신청을 했어요. 이번만은 수락 과정이 길었어요. 약 1년? 면접도 봐야 했어요.”

그녀는 부산에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이 됐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놀랐다. 자신의 터전을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오서영씨처럼 홱홱 바꾸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공무원 아닌가? 공무원의 유랑 생활이라? 그 유랑은 즉흥적이었다. 비교하자면 오서영씨 가족의 삶은 여행자의 삶, 등반지를 찾아 떠도는 클라이머의 그것과 비슷했다. 나에게 이것은 반전이었다. ‘공무원은 변화를 싫어하고 모험을 꺼리는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살아온 패턴이 공무원의 성질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녀가 답했다.

“제 사주에도 그렇게 나와요. 역마살까지는 아닌데, 하는 일에 변화가 많다고요. 일반적인 공무원 사주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무엇보다 놀란 게 남편분의 선택이에요. 남편분이 하고 싶은 것, 살고 싶은 곳도 있었을 텐데요?”

“주변에서도 많이 궁금해하고 신기해해요. 남편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제 의견을 잘 수용해 줘요.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하고요.”

오서영씨 남편 의견은 듣지 못했다. 그는 아내가 편하게 인터뷰할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웬만한 크기 이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그가 그녀를 맹목적으로 따른 것 같진 않다. 도시에 사는 대다수는 일상이 버겁다고 한다. 파삭 부서질 것 같은 건조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때 누군가 그 지긋지긋함에서 탈출하게 해주겠다고 손을 내민다면, 무조건 그 손을 잡기보다 망설일 것 같다. 오서영씨 남편에게 그것은 아내의 손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덥석 잡고 빠져 나온 게 아닐까?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믿었을 것이다.

 

오서영씨는 아이 둘을 둔 엄마이기도 하다. 육아는 남편과 똑같이 나눠서 한다. 덕분에 그녀는 마음놓고 등산을 즐긴다.

 

“그래서, 부산 생활은 만족하나요?”

”네, 부산 오니까 좋아요. 100%! 서울만큼 복잡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도시생활을 누릴 수 있고, 산이 있고 바다도 가깝고요. 고립됐다는 느낌도 없고요. 고향이라서 그런지 심리적 안정감도 들고요.”

“집값은 어떤가요?”

“서울보다 확실히 저렴하죠. 적은 비용에 주거 만족도도 높아졌고요. 집은 ‘영끌’대출로 샀어요. 33년 갚아야 해요. 그런데 엄청나게 기분 좋았어요. ‘나 이렇게 대출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됐구나!’하면서 기뻤어요.”

타지생활 13년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좌충우돌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갔다. 산도 그 와중에 접했다. 이른바 자아실현 했다. 이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는 꽤 많은 시간을 쓴 셈인데, 억울하게도 또 병까지 얻었다. 대충 넘어갈 몸상태가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공정거래관련법규집'이다. 굉장히 두껍다. 그녀가 하는 일을 물성으로 표현한다면 분명 딱딱할 것이다

 

암 정복

“6년 전인가? 암에 걸렸어요. 목이 많이 부어서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암이라고 하더라고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암덩어리가 커서 장기를 완전히 들어냈어요. 평생 약을 먹어야 해요.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데 이상 없이 건강해요.”

병, 특히 암은 막강한 벽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몸이 벌벌 떨리는 험악하게 생긴 벽! 우회로는 없고 오직 넘어야 한다. 그 앞에 섰을 때 심경이 어땠을까? 오서영씨 블로그에서 퍼왔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병 앞에서 나는 순순히 승진 욕심을 내려놓았다. 아이들도 어리고, 살면서 못 해본 것도 많고, 가진 건 몸뚱아리뿐인데 건강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휴직을 하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한낱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체감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하고 병을 치료했다. 몸이 나아지고 회사 복귀 전에 그녀는 독서모임에 나갔다. 멤버는 단 3명이었는데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그녀는 정유정 작가가 쓴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었다. 이후 히말라야에 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 책상 뒤에 등산 관련 그림들이 걸려 있다. 누가 봐도 등산마니아, 하지만 직장에서의 옷차림은 완전히 반대다.

 

“저랑 똑같은 사람이 독서모임에 있었어요. 정유정 작가님의 책을 읽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꿈꾸는. 그분께 ‘우리 히말라야 갈까요?’ 물었죠. 바로 멤버가 결성됐어요. 1년 뒤에 가자고 약속하고 각자 운동했어요. 10개월 정도 출근 전에 피트니스센터에 들렀고 달리기도 열심히 했어요. 딱 1년 뒤, 직장 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5일 휴가를 냈어요. 멤버 모두 네팔 히말라야 푼힐전망대까지 갔다왔어요.”

“많은 여성 여행객들이 호캉스를 선호해요. 그런데 굳이 왜 힘든 트레킹을 택했죠?”

“책이 큰 역할을 한 거죠. 정유정 작가님이 글을 정말 잘 쓰셨거든요.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곳으로 가자!’고 생각했어요.”

2020년, 오서영씨는 독서모임 멤버들과 네팔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푼힐 전망대까지 갔었다.

 

“생각대로 좋았나요?”

“여자 셋이 애들을 남편한테 맡긴 채 일종의 일탈을 맛본 게 좋았어요.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무사히 트레킹을 끝냈다는 것에 흥분도 좀 됐어요.”

“그 여운이 부산까지 이어진 것이군요?” (그녀는 네팔 트레킹 후 바로 부산으로 건너갔다)

“맞아요. 부산 와서도 다른 독서모임에 나갔어요. 여기서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등산모임을 만들었는데, 고민하지 않고 가입했죠.”

“등산이 왜 좋죠? 체력적인 한계에 부딛친 다음 그걸 깨부수는 재미로 산에 가나요?”

“다 좋아요. 함께 가도 좋고, 혼자 가도 좋고. 내려와서 먹는 막걸리와 파전도 좋아요. 산에서 오르막을 만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한발 두발 내딛다보면 고통 속에서 어느 순간 무념무상이 되더라고요. 그 순간도 좋아요. 두 발로 힘 닿는 데까지 가보자! 이런 마음이 저절로 들어요. 삶의 의욕이 생기는 거죠. 집으로 돌아와 반신욕하면서 와인 한잔 마시는 건 최고의 힐링이에요.”

우리는 오서영씨가 일하는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황령산 야간산행을 한다고 했다. 출발지는 남구도서관. 여기서 저녁 7시쯤 오서영씨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헤어밴드를 두르고 헤드랜턴을 뒤집어 쓴 채 등장했다. 두꺼운 고어텍스 재킷을 걸쳤고 레깅스도 눈에 띄었다. 등에는 샘소나이트 일반 배낭을 멘 채였다. 

회사에 메고 다니는 가방을 그대로 메고 왔다. 그녀는 등산 배낭을 메고 출근하는 건 좀 그렇다고 했다.

 

변신하고 온 오서영씨를 보자 사진기자가 말했다. “슈퍼맨이 드디어 환복하고 나타난 것 같군요!” 그녀는 이 말을 무척 좋아했다. 이어서 내가 물었다.

“산을 넘어 집으로 가실 계획이군요? 아이들이 등산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오는 엄마에게 섭섭하다고 하진 않나요?”

“올해 초부터 매주 목요일에 퇴근 후 야등으로 귀가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엄마가 집에 늦게 와서 좋아하더라고요. 저녁에 아빠와 특식을 먹기도 하면서 남자 셋이 편하게 있는 것 같던 대요. 아이들이 ‘엄마는 왜 등산이 좋냐’고 물어보길래 ‘너희들이 친구들과 축구하는 게 재미있는 것처럼 엄마도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 좋은 경치 보고 운동도 하고 맛있는 거 먹어서 좋아’라고 했어요. 그러니 이해하더라고요.”

“저희 기차 시간 때문에 가야 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루고 싶은 꿈이 뭐죠?”

“등산하면서 버킷리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올해는 한라산 ZPT, 지리산 종주, 불수사도북 종주를 계획하고 있고요, 100대 명산을 끝내고 나면 해외의 명산 트레킹도 다녀보고 싶어요. 꾸준히 걷는 사람이 제 꿈이에요.”

오서영씨는 까칠하지 않았다. 잘 웃었고 친절했다. 산에서 처음 보는 50대 아저씨가 말을 걸어도 무서워하지 않는 MBTI E성향이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라는 말을 좋아한다. 몸은 이제 완전히 나아 승진해야 한다며 눈을 반짝였다. 반전, 반전! 나는 액젓 넣은 찌개 한 숟가락 맛본 것처럼 “캬!”하면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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