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냉산
냉산 활공장에서 바라본 풍경(낙동강, 금오산 너머 백두대간).
겨울 아침 영하 5℃, 바람 불어 발목이 시리다. 인색한 햇살 너머 금오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데 경내의 소나무는 모두 굵고 길게 자라 낙락장송落落長松, 그래선지 사하촌 마을 이름도 소나무골 송곡松谷이다.
해발 694m 냉산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인근 도개면 등 일대까지 걸쳐 있다. 낙동강과 크고 작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기 좋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산성을 쌓고 견훤과 싸워 통일 대업을 이뤄 태조산이라고도 부른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하고 세운 도리사, 산성 터, 금수굴 등이 있다. 보통 절집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많이 하는데 대략 9km, 4시간 안팎 걸린다.
오전 9시45분 도리사에서 가파른 소나무숲 몇 발자국 오르면서 연신 바위에 신발을 올려놓고 양말을 당겨 신는다. 바쁘게 나오며 낮은 산이라 생각해선지 준비에 소홀했던 것. 오전 10시경 능선 갈림길. 정상은 나중에 오르기로 하고 먼저 왼쪽으로 걷는다. 군데군데 눈 쌓인 낙엽, 날은 추워서 손 시리고 볼펜도 얼어서 잘 구르지 않는다. 산악레포츠공원 갈림길까지 10분 남짓 걸렸다.
소나무 숲.
내려가다 다시 오르는 능선 숲길에는 노간주·떡갈·신갈·굴참·상수리·당단풍·진달래·산벚·생강·감태·소나무들. 떨어진 나뭇잎 보면 확실히 참나무 종류를 알 수 있다. 떡갈나무 잎이 제일 크고 그 다음이 신갈, 굴참나무와 상수리 잎은 얼추 비슷하다. 10시20분 낙동강 물줄기 바라본다. 추위로 새파랗게 얼어버렸다. 데크 전망대(도리사 2.2km·불교성지 7.2km)에 서니 강 건너 상주 땅, 비봉산, 갑장산, 흐리지만 멀리 속리산 너머까지 들어온다.
도읍이 되려 했던 선산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 군데군데 돌을 받친 산성의 흔적들이 역력한데 숭신산성이다. 왕건은 925년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이곳으로 퇴각한다. 선산의 김선궁, 해평 김훤술과 더불어 낙동강을 사이 두고 결사 항전 끝에 승리를 거둔다. 역사는 이긴 사람의 몫이라 생각하며 걷는데 어느덧 왼쪽으로 금수굴 내려가는 갈림길. 숭신산성과 헬기장 터에는 이끼 덮인 널브러진 돌, 벽돌, 나뭇등걸 등 어수선한 옛터다.
능선 갈림길.
왼쪽 저 멀리 구미시가지, 원래 선산군 구미면이었지만 이제는 선산이 읍이 되어 구미시에 속하게 되었다. 문학을 숭상하고 백성들의 풍습이 순박하다는 선산은 한때 도읍이 되려 했던 고을로 장원방壯元房이라 불렸다. “조선 인재 절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했다. 길재, 김숙자, 하위지, 이맹전, 장현광 등. 근래에는 두 분 대통령도 이 지역 출신이다.
구미공단과 낙동강, 반대편 도로의 시끄러운 차 소리, 뒤에는 냉산이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아래 도리사. 수태극水太極을 그리는 긴 강줄기 선명하다. 바다같이 드넓은 해평海平, 강물은 꽝꽝 얼어버렸다. 흐릿한 물빛도 서로에게 흐르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떠 있는데 전설의 낙동강 오리알, 휘파람 떠난 갈대숲 이야기만 애달프다.
산성터.
동남방 오른쪽으로 대구 팔공산, 칠곡 유학산, 바로 앞에 구미 금오산, 그 너머 희부연 가야산 덕유산, 김천 황악산, 영동의 민주지산, 먼산 주름 선명하고 눈을 당겨 상주의 강나루, 속리산까지 백두대간의 겨울 산하는 흐릿한 먹빛으로 그려졌다. 산성 터 돌부리에 쌓인 눈바람에 발목이 시리지만 북풍한설 밤낮 칼바람 맞고 선 저 나무들에 비하면 호사다.
금수굴.
금수굴과 임도
오전 11시경 이파리 달고 있는 상수리·떡갈나무 바라보다 다시 금수굴 갈림길, 곧바로 내리막 눈앞이 탁 트인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금오산이 더 가까워졌고 낙동강이 발아래 있다. 둔덕, 버덩, 곧 사라질 몇 개의 다랑이, 시골 정서를 해친 축사, 논길, 도로, 비닐하우스, 겨울 강 너머 논틀밭틀, 자연을 할퀸 채석장, 흐릿한 산 구름, 그 위로 습관처럼 흐린 하늘.
활공장 바로 밑 갈림길 내려서자 오른쪽 절벽 아래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으로 알려진 금수굴이다. 된비알에 낙엽 쌓여 낭떠러지인지 길인지 분간이 안 되는 위험한 구간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200m쯤 내려간다. 발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강바람에 귓불이 얼얼하고 눈까지 쌓였다. 서넛이 피할 수 있는 작은 바위굴 살피다 밧줄 당겨 200개 넘는 계단을 또 오른다. 여기서 냉산 정상 3.4km 거리. 역광에 눈부셔 되돌아선 태조산정, 임도 구간 합류 지점에 닿으니 11시 반이다. 몇 년 전, 잘 닦인 임도 따라 자동차로 여기까지 왔던 그때의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으리라.
냉산.
임도林道는 산림경영과 휴양레포츠, 산불방지를 위한 도로로 동맥 역할을 한다. 1965년 광릉 임업시험림에서 시작,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2만km 넘게 개설됐으나 1ha 기준 3.6m 정도, 독일 46m·일본 13m보다 아주 짧다. 우리나라는 산악 지형이라는 특성이 있으나 산불방지나 휴양레포츠까지 고려, 임도를 많이 늘려야 한다. 앞에 나타난 냉산을 바라보며 걷는데 하얗게 눈발이 날린다. 임도 덕분에 능선으로 오르지 않아 정상까지 대략 2km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냉산 정상.
물길 따라 흘러온 이야기들
20분 걸어서 산으로 오르는 갈림길, 임도에서 왼쪽으로 0.3km쯤 15분 정도 올라 정오 무렵 능선 합류 지점에 닿는다. 오른쪽 강 아래서 불어오는 차가운 눈바람은 온통 부옇다. 흐릿한 햇살에 영롱한 눈의 결정체, 파랑 하양 스펙트럼이다. 수첩에도 눈이 내려앉아 입김으로 호호 부니 이내 사라진다. 바위에 앉아 물 한 잔 마신다. 길섶에 은방울꽃잎, 자세히 바라보니 비비추인 듯 이파리만 하얗게 남아 겨울을 나고 있다.
쌓아놓은 돌탑 너머 낙동강, 금오산. 바위투성이 골산骨山과 국토의 젖줄 강물에서 마치 음양의 조화를 보는 듯, 그러나 몇 년 사이 힘을 잃었다. 내리는 눈발 맞으며 저 넓은 산하를 화폭 삼아 수묵화를 그려본다. 정체된 물길을 흐르게 하고 창검을 닮은 금오산金烏山(977m)의 불기운을 누그러뜨리려 솔숲은 짙은 먹으로 흥건하게 흘려 놓는다. 중화된 동양화다.
도리사 경내.
풀풀 날리는 눈발을 두고 잠깐 사이 냉산 694m 정상에 섰다. 찰 냉冷, 차가운 산이다. 왜 차가운 산인가? 바위 사이에서 아지랑이 같은 냉기가 흘러나와 냉산이라는데 마주 보는 태양의 금오산을 식히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냉冷은 뜨거운 것을 ‘식힌다’는 뜻이 있다. 냉산을 태조산이라고도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조산은 선산도호부 동쪽 13리, 냉산은 15리에 있다’고 했다.
산 뒤에서 들리는 자동차 굉음에 돌탑을 두고 낙엽 덮인 미끄러운 바위 산길 조심조심 내려간다. 급경사 구간 지나 7부 능선에 자리 잡은 도리사 경내로 들어섰다. 절집 뒤에 빤히 보이는 1km 정상을 두고 빙빙 돌아 무려 3시간 반 넘게 걸었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일선 땅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살다 눈 속에 복숭아·자두꽃이 핀 것을 보고 도리사桃李寺라 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불교가 공인되기 110년쯤 전이다.
도리사 복숭아·자두꽃 등롱
오후 1시경 서대의 소나무에 서서 금오산 쪽으로 고개를 든다. 풍수적으로 금오탁시金烏琢屍 제왕 터, 그러나 위험한 형국이라는 것. 서기 418년경 저녁 노을 바라보던 고구려 스님은 태양 속 금까마귀를 생각하며 금오산金烏山이라 호명했고 손가락 가리켜直指 황악산 기슭에 직지사直指寺를 지었을 것이다.
모전탑, 좌선대를 둘러보며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복숭아·자두꽃 등롱燈籠을 바라본다. 경내 절집은 무척 오래되어 옛 정취 역력한데 까마귀도 ‘골각골각’ 옛날처럼 운다.
아도화상 조망 터(서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도리사를 암자 있던 곳에 새로 지었는데 직지사보다 훨씬 컸지. 산악레포츠공원 생기고 대박 났어. 국밥집이.”
산에서 내려오니 근처 해평에 사는 뿔따구 선배님이 차에서 기다린다. 뿔의 뜻. ‘성질났다’는 경상도 사투리다. 도저히 설득될 수 없는 저 금오산을 닮았다. 국밥 한번 멋지게 비우고 달린다.
산행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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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사에서 능선길, 산성 터, 활공장, 금수굴, 태조산정, 임도, 정상, 도리사까지 돌아오는 데 약 9㎞, 4시간 정도 걸림(주능선 산불 기간 2.1~5.15 통제)
교통
고속도로 경부(구미 IC), 중부내륙(선산 IC), 중앙(가산 IC) → 25번국도 → 도리사
※ 내비게이션 → 도리사(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국도 25호선에서 도리사 방향,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 현판 일주문 통과, 4~5㎞가량 진행 도리사 주차장
기차 경부선 KTX 등 구미역 정차. 구미역 앞에 시내버스 있지만 대중교통 불편.
숙식 선산 읍내 숙식 가능, 한정식, 추어탕, 국밥집 등 다양한 식당과 옥성자연휴양림(예약), 모텔, 여관 등이 있음.
주변 볼거리 일선리 문화재 마을, 신라 불교 초전지, 의구총, 왕산 허위 기념관(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구미), 채미정(구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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