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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낭만야영] 칼 바람 얻어맞으며 텐트 피칭...케이크·와인 한잔으로 언 몸 녹이다

by 白馬 2022. 4. 5.

월여산 3봉 정상에서의 ‘혼캠’

 

월여산 3봉의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야영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입춘이 지났지만 연일 곳곳에 한파주의보가 발효될 정도로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2월 1일부터 이른 산불방지 기간이 시작된 곳이 많아 백패킹할 마땅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SNS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창 월여산은 작년에 종주했던 합천의 대병오악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합천호를 중심으로 멋진 암릉이 펼쳐진 코스였다. 설 연휴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해 이번 산행은 홀로 조용히 움직였다.

월여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863.5m의 산으로, 재안산, 황매산과 이어져 있다. 우리 신화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마고할미의 외동딸 월여가 살았다고 해서 월여산이라는 설이 있다. 예부터 이 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다고 하여 월영산月迎山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월여산은 소원을 비는 산으로 유명한데, 무학대사가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해동 제일의 명당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 어두운 시간, 첫차를 타고 거창으로 향했다. 거창터미널에 도착하자 싸늘한 공기가 엄습했다. 군내 버스는 자리 하나만 채운 채 신기마을로 달렸다. 한참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는 신기마을 표지석 앞에 멈춰 섰다. 황량한 겨울 풍경에 거센 찬바람까지 더해 스산했다. 마을 입구에 늘어선 산불조심 깃발은 바람을 타고 요란스레 펄럭이고 있었다. 간간이 스쳐가는 차량 몇 대 말고는 인적이 없었다.

 

재안산 암릉 뒤로 월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월여산은 감악산이나 황매산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암릉을 타는 재미가 있고, 감악산과 합천호의 멋진 전망을 더해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백패커들은 감악산과 황매산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지나는 길에 들르는 정도로, 야영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블로그 사진들을 검색해 보니 재안산에는 야영지가 없고, 월여산 쪽에 텐트 한 동 칠 정도의 자리가 있는 듯했다. 대부분 월여산에서 재안산 방향으로 종주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는 5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재안산을 먼저 오르기로 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름길로 코스를 정했다. 들머리까지는 한적한 마을을 한참 가로질러야 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온 동네 견공들이 경보기를 울리듯 짖어댔다.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는 무덤들이 보였다. 날카롭게 두 뺨을 스치는 찬 바람은 냇가의 갈대 숲을 지날 때마다 웅웅 소리를 냈다. 정오 햇살이 비치는 황량한 들녘의 살풍경에 스산한 바람까지 더해 오감이 곤두섰다. 순간 나뭇가지를 밟고 그 소리에 놀라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온갖 수상한 소리들을 잠재웠다.

 

지름길 초입에 들어서자 무덤이 나타났다. 앙상한 나무숲 사이로, 수북하게 쌓인 낙엽 위로 사라진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간간이 보이는 시그널을 찾아 헤매느라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홀린 건가? GPS를 켜고 무작정 재안산 정상 방향으로 걸었다. 낙엽층이 얇아지면서 오르막이 나왔다. 반대쪽으로 노란 시그널이 보였다. 조난당할 일은 없겠지만, 으스스한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급경사가 시작돼 땅은 코에 닿을 듯 가팔랐다. 굳게 언 땅 위로 콩알만 한 잔돌 부스러기들이 얄밉게 등산화를 밀어냈다. 까딱하다가는 그대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질 판이었다. 스틱에 의존해 겨우 잔나무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나무를 부여잡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군데군데 바위가 있어 한결 수월했다. 예상보다 지체됐지만, 무사히 재안산 정상에 올라섰다.

 

월여산 3봉. 뒤에 보이는 봉우리는 2봉, 만물상 뒤로 감악산까지 보인다. 7성급 호텔 못지않은 멋진 야영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무섭긴 처음

월여산으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멋진 경치가 펼쳐졌다. 합천호 너머로 대병5악의 의룡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이 위풍당당하게 뻗어 있었다. 멋진 암릉지대가 이어졌다. 바위 위로 올라가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조금만 올라서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해가 기울면서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져 얇은 우모복을 꺼내 입었다. 마주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월여산은 오롯이 내 차지였다.
 

지리재에 도착하자 기이하게 뻗어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내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산을 지키는 신성한 나무처럼 느껴졌다. 다시 된비알이 시작됐다. 왜 사람들이 월여산에서 시작하는지 이해가 갔다. 다리를 있는 힘껏 들어올려야 발을 내디딜 수 있을 정도로 단차가 심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자 바람은 사라지고 철쭉 군락지가 나타났다.

바닥 여기저기 멧돼지가 갓 파헤쳐놓은 구덩이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순간 철쭉나무들 사이로 멧돼지가 뛰쳐나올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스틱을 모아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멧돼지가 있건 없건 스틱 소리가 보호막이라도 되는 듯 안심이 됐다. 혼자 다닐 때 사람을 무서워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지리재 한가운데 고목이 서있다. 여느 나무와 달리 기이한 모습이 마치 월여산을 지키는 수호수 같다.

 

드디어 월여산 3봉이 보였다. 그 너머로 서늘한 태양이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헤엄치 듯 재빨리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을 빨리 감기 한 듯한 공간에서 억새 홀씨인지 눈인지 모를 무언가가 하늘거리며 날아다녔다. 장갑을 벗고 손을 뻗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눈이었다.

 

계단을 올라 월여산 3봉에 도착했다. 갑자기 바뀐 거친 공기의 흐름에 당황스러웠다. 매서운 추위를 장전한 채 덤벼드는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멀리 감악산과 가야산 쪽 하늘이 희뿌옇게 갇혀 있었다. 그쪽에서 내리는 눈이 월여산까지 날려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월여산만 하늘이 열려 있었다.

 

배낭을 내려두고 2봉에 올랐지만 자리가 마땅치 않아 3봉으로 되돌아 왔다. 바람을 가르며 텐트를 쳤다. 잠깐 사이에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손가락은 물론 등산화 속 발가락들도 감각이 사라져 뭉툭한 돌덩어리를 달고 있는 느낌이었다. 재빨리 텐트 안으로 들어가 침낭을 폈다. 온기가 더해지자 침낭 속은 천국이었다. 준비해 온 치즈케이크로 허기진 배를 달래며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몸 속에 퍼지는 달콤함이 수축된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해가 지고 야경을 찍기 위해 다시 2봉에 올랐지만, 멈출 줄 모르는 바람에 흔들려 밤하늘의 별들은 꼬리가 생기기 일쑤였다. 겨우 한두 장을 건지고 텐트로 돌아왔다. 침낭 속에 누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회오리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점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불어닥친 바람은 텐트를 물어 뜯듯 사정없이 흔들어대고는 멀리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무겁지만 견고한 동계텐트를 챙겨오기를 잘했다.

 

친구가 알려준 레시피로 만든 치즈 케이크. 달콤함이 몸을 녹였다.

 

질서정연한 바위들, 이번 산행의 메인

눈을 뜨니 오전 6시 반. 카메라를 챙겨 들고 또다시 2봉을 올랐다.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흔들어대던 미친 바람도 사라졌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 가쁜 날숨에 뿜어 나오는 입김만이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다 사라졌다. 합천호 너머 동쪽 하늘은 산그리메를 따라 어슴프레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3봉의 텐트는 점점 밝아지는 하늘과 대비되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두웠던 합천호가 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잠시 서쪽의 만물상을 찍고 있는 사이 해가 빼꼼 올라왔다. 붉은 태양은 온화한 빛을 비추며 차가운 공기를 정화시켰다. 곱았던 손가락에 온기가 느껴졌다.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풍경을 감상하다 허기를 느끼고 나서야 텐트로 돌아가 빵과 과일로 아침식사를 했다. 사진을 찍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혼자 떠나면 넋 놓고 시간을 놓칠 때가 많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 시간을 맞추려면 1시간 반 만에 하산해야 한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월여산 정상으로 향했다. 아담한 정상석이 자리한 월여산에 조망은 없었다.

이번 산행의 메인은 만물상이라서 서둘러 내려갔다. 길에서 벗어나 만물상으로 내려갔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자 가지각색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묘하게 질서를 유지하며 늘어서 있었다. 바위를 타고 좀더 내려갔다. 바위 사이로 하산길이 있었지만, 큰 배낭을 메고 혼자는 위험할 것 같아 되돌아 갔다. 하산 길은 수월했다. 서두른 덕분에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을 벗어나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데, 임도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재안산에서 월여산으로 가는 능선에서 보이는 풍경. 합천호 너머로 대병5악의 의룡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이 조망된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급기야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버스를 놓치면 2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10분, 5분… 드디어 산불조심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는 순간 버스는 멈추지 않고 신기마을 입구를 지나쳐 갔다. 버스 노선을 검색해 보니, 버스는 하루에 몇 번씩 나누어 순환운행하고 있었다. 거창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면 종점을 지나 다른 마을을 거쳐 거창으로 갈 것이었다.

건너편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 어제와 같은 시간이 되자 버스는 정확히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거창행인지 재차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은 “산에서 잤냐”며 말을 걸더니, 거창의 좋은 산들을 추천해 주었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월여산 하산길에 만난 칠형제 바위. 각각의 바위에서 인증샷을 찍고 익살스럽게 합성을 해보았다.

 

산행 정보

1일차 신기마을 입구(246m)~재안산(738m)~지리재(618m)~월여산 3봉(850m) <7.1km, 4시간 30분 소요>

2일차 월여산 3봉~월여산 2봉(855m)~월여산 정상(863.5m)~만물상(795m)~칠형제바위(630m)~신기마을 <4.5km, 1시간 45분 소요>

 

대중교통 정보

거창터미널에서 서흥여객버스터미널로 이동(약 5분거리). 거창터미널 출발-신원행은 청수 혹은 양지를 경유하는 순환버스이다. 신기마을은 신원에서 버스로 5분거리이기 때문에 둘 다 이용 가능하다.(순환 노선은 1시간 간격)

 

월여산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만물상은 갖가지 형태의 바위가 군집해 있어 리지 등반을 즐기는 산꾼들에게 인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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