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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명승 명산 북악산] 조선의 主山이었던 당대 최고 명산

by 白馬 2022. 1. 28.

한국의 명승’ 명산  북악산 일대
원래 지명은 백악산신에서 유래한 백악…고려 때부터 명당으로 알려져

 

조선시대 한양의 주산이었던 북악산에 눈이 살짝 내렸다.

 

북악산北岳山(342m) 관련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대통령이 수행원을 데리고 북악산에 올랐다. 정상 비석을 보면서 “북악산인 줄 알았는데 왜 백악산이라고 돼 있느냐”고 수행원에게 물었다. 관련 수행원이 “원래 백악산으로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북악산으로 바뀌었다”고 답했다. 바로 되돌아온 지시가 “그러면 일제 강점기 바뀐 지명을 전부 파악해서 원래대로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후 관련 부처는 일제히 일제 강점기 바뀐 산지명을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고 당시 수행자가 전했다.

 

정말 백악산이 일제 강점기 때 북악산으로 바뀌었을까? 현재 북악산이란 지명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명위원회를 거쳐 1961년 4월 지정 고시한 국가 공식 지명이다. 그렇다면 옛 문헌에는 뭐라고 기록돼 있을까?

<삼국유사> 기이편에 ‘(전략) 웅녀가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했다.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 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후략)’ 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백악산은 신화의 산이다. 지금의 백악산은 물론 아니다.

 

북악산 한양도성길 출발지이자 도착지점인 창의문.

 

〈고려사〉에서는 백악산 관련 ‘삼소三蘇’란 명칭이 몇 차례 등장한다. 도읍 개성의 지덕을 살리기 위해 새로 궁궐을 건립했던 세 곳을 가리킨다. 좌소 백악산白岳山, 우소 백마산, 북소 기달산을 말한다. 실제 삼소조성도감을 설치해서 궁궐을 창건했다. 좌소 백악산은 일부에서 백학산이라고도 나오며, 지금의 백악산은 아닌 걸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도 한양은 도읍 후보지로 계속 거론되며, 중기 들어서는 천도까지 고려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사>에 ‘삼각산은 오덕을 갖춘 땅이다. 오덕이란 중앙에는 면악面岳(남산)이 있어 둥근 형상이 되니 토덕土德이요, 북쪽에는 감악紺岳이 있어 굽은 형상이 되니 수덕水德이요, 남쪽에는 관악산이 뾰족하게 솟아 있으니 화덕火德이요, 동쪽에는 양주 남행산南行山이 곧은 형상이 있으니 목덕木德이요, 서쪽에는 수주樹州의 북악이 있어 모난 형상이니 금덕金德으로 수도를 세우기에 합당하다’는 내용을 소개한다. 같은 책 다른 부분엔 ‘남경의 진산 삼각산은 화산으로서 목성을 가진 나라의 수도가 될 땅이니, 그곳을 수도로 삼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들어서 백악산은 천하의 명산과 명당으로 자리매김한다. 주산을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백악산과 인왕산을 놓고 논란을 벌였으나 백악산을 주장한 정도전이 결국 승리한다.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을 향하여 다스렸으니 동향으로 도읍을 창설할 수 없다”는 내용을 관철시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쓴 ‘자북정도’ 비석이 북악산 한양도성길에 있다. ‘자하문 북쪽의 바른 길’ 정도로 뜻이겠다.

 
조선시대 주로 백악 사용, 간혹 북악 등장

조선 초기 오악 중에 중악으로 백악산을 지정했다. 남악 관악산, 동악 치악산, 북악 감악산, 서악 송악산 등이다. 고려 말 공양왕 때 한양천도에 반대했던 여말선초 문신이자 학자였던 박의중(1337~1403)은 조선이 개국하자 돌변한다. ‘북악이 뒤에 솟았으니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봉이 앞에 높이 솟았는데 성곽이 사면으로 둘렀다. 모두 예겸의 <등루부登樓賦>에 있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렸으니 금성 천부로다’라고 한양을 극찬하는 시를 남겼다.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예겸도 ‘북악이 뒤에서 솟아 있어 궁전의 휘황함을 더해 주고 남산이 앞에 우뚝하며 성곽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명확한 방향성을 나타낼 때는 조선시대에도 ‘북악’이라는 표현을 간혹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외 대부분 문헌에는 ‘백악’으로 등장한다. 나라의 중심인 중악으로 숭상했을 뿐만 아니라 도성의 주산으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태종 때는 삼각산의 신위를 백악산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옮겨 백악산에서 함께 모시기까지 했다고 <태종실록>에 보인다. 삼각의 신은 남쪽으로 향하고, 백악의 신은 서쪽으로 향하게 했다고 나온다. 왕조실록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거나 명당에 관한 상소라든가 다양한 내용들이 백악산 이름으로 소개된다. 그중 <세종실록> ‘명당과 관한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친히 보고 가부를 결정하리라’는 제목으로 나온 내용이다.

 

‘황희·김자지·정인지·안숭선 등이 이양달 등을 데리고 백악산에 올라 살펴보고, 또 봉황암에 올라가 살펴 바라보았는데, 이진·신효창·최양선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의 바른 줄기가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의 명당이 이만한 데가 없다” 하고,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의 바른 봉우리가 직접 백악봉으로 내려왔다” 하여, 두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내가 친히 백악의 내맥 들어온 곳에 올라가 보고, 그 가부를 결정하리라”고 했다.’ 

 

<조선지지자료>엔 백악산과 북악산이 혼용해서 기록돼 있다.

 

명당 관련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내내 등장한다. <세조실록>에 명당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된다. 

‘<혈법비요穴法秘要>에 이르기를 삼양三陽이 촉박하지 않아야 한다. 명당이 내양內陽이 되고, 안산案山이 중양이 되고, 뒷산이 외양이 되니, 이것을 삼양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이 명당은 삼각산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내려와서 조종祖宗이 되고, 아래에 한 봉요峰腰를 지어 다시 보현의 두 봉을 일으키니,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 음양이 서로 나타나서 부모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우익이 좌우로 흔들며 남쪽으로 향하여 장막이 거듭거듭 수렴하고 뒷 기운이 동서로 옹포擁抱하고 가운데에 큰 간룡이 있어 흔들고 내려와서 유입수酉入首로 백악산이 되었으며, 조종이 감산坎山인데 입수도 또한 감산이며, (중략) 만승의 진존과도 같아 명당을 좌진하니, 이른 관란의 주인이요, 산수가 조화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한양 도성은 천하의 명당이라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도성의 주산은 백악이고, 한양의 진산은 삼각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간혹 헷갈려 사용하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도성의 진산은 백악이다. 산정에 사당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악산이 중사일 뿐만 아니라 오진 중 중진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백악산은 삼각산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의 명산반열에 올랐고, 명당 대접을 받았다. 대부분 백악산이란 지명으로 사용했지만 북악이란 지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에 정말 백악산이 북악으로 바뀌었을까? 일제 때 한반도 지명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백악산과 북악산이 동시에 등장한다. 경기도 한성부에 ‘백악산은 한성 북방에 위요圍繞한 준봉이니… (후략)’라고 나오고, 산악편에는 북악산으로 기록돼 있다. 어디에도 일제가 자의적·일방적으로 백악을 북악으로 바꾼 것 같지 않다. 지명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북악이란 지명은 지금 억울하게 일제가 바꾼 지명으로 누명을 쓰고 있는 격이다. 

 

조선의 주산이었던 북악산 주능선과 오른쪽 인왕산, 남산타워가 있는 남산, 그리고 남산 오른쪽에 외사산이었던 관악산이 보인다.

 
백악 대신 공극산·면악이란 기록도 있어

백악이란 지명은 원래 백악산신에서 유래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한성의 북악인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아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니 그 사당을 백악신사라 하고, 이 신사가 있는 산을 백악이라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자, 공용경은 “백악은 북쪽 끝을 끼고 있어 공극控極”이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옛 문헌에 등장한 백악·북악의 다른 지명은 면악面嶽·공극산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북악은 조선시대부터 천하의 명당이자 명산으로 자리매김했다. 문화재청은 2009년 12월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백악산 일원을 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정이유를 밝혔다. 

 

‘백악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주산으로 삼았던 산인데 현재는 북악산으로 불린다.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도시를 새로 구성했는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삼아 배경이 되게 했고,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을 안산으로 두어 남쪽 경계로 삼았다. 동쪽의 낙산이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주산인 백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짓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한양 도성계획을 세웠다. 곧 백악산은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의 도성을 계획할 때 중심이 되었다. 문화재 명칭을 백악산으로 한 것은 조선시대 도성 축성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에 나타나는 백악의 지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제36호) 등이 있는 백악산 일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문화재청은 국가에서 지정 고시한 북악을 굳이 백악산으로 정상 비석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그걸 보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북한산을 두고 삼각산 혹은 부아악이란 지명으로 정상 비석을 세운 것과 똑같은 격이다. 어쨌든 북악산은 한 시대를 풍미한 조선 최고의 명산이었다. 

 

한양 도성은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서쪽 인왕산, 동쪽 낙산, 남쪽 남산으로 축성을 하면서 이 4개의 산을 내사산이라 했다. 한양도성길 북악산 코스는 자하문(원래 창의문)에서 시작해서 숙정문(원래 숙청문)을 거쳐 혜화문까지 약 5km이고, 3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한양 도성 사대문이 동 흥인지문, 서 돈의문, 남 숭례문, 북 숙정문이고, 사대문 사이에 사소문이라 해서 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 등 작은 문을 하나씩 두었다. 한양도성길을 탐방하면서 볼거리들이다. 역사를 알고 보면 그만큼 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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