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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인간은 山의 살과 뼈를 발라냈지만…자연의 치유력은 놀랍다

by 白馬 2021. 9. 28.

산간 임도의 변화
청설모와 다람쥐가 바빠지면 머잖아 가을

 

강물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원도 인제의 어느 시골 마을.

 

입추 지나자 산골은 서늘해졌다. 가래나무는 색이 바랜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하고, 밤알만 하던 가래 열매는 호두 크기로 자라 이른 아침 청설모들이 나뭇가지를 건너뛰며 식량 관리로 분주하다. 산 열매들이 익는 시점을 정확하게 알려면 청설모나 다람쥐들이 언제 잣이나 가래 같은 열매를 따서 모으기 시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름장마 없이 비가 6월에 집중되는 바람에 저수지의 수량은 줄고 계곡은 바닥을 내비치는 중이다. 숲은 알맞은 습기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바로 바다를 끼고 있는 열대 혹은 아열대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몬순 때문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나라 여름 날씨를 보면 낮에 구름이 응집해 저녁에 비를 쏟고, 밤에 개는 일기가 반복되다 보니 숲은 늘 젖어 있는 것이 가능하지만, 수량이 모여 도랑이나 저수지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반면 지난겨울은 충분히 추웠기에 올 여름에는 벌레나 나방의 개체 수가 확연히 줄었다. 밖에 불만 켜면 창문에 부딪혀 떨어지는 나방이며 날벌레들이 아침이면 땅바닥에 한가득했다. 하지만 올해는 작년의 1할도 안 될 정도로 줄었다. 그러자 나방의 애벌레나 곤충을 잡아먹는 새들도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쌍살벌이나 말벌 같은 육식 곤충 개체 수도 확연히 줄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곳곳에 벌집을 지어 풀 베거나 밭을 매려면 손에 살충제를 들고 다녀야 했다.

“태풍만 안 지나가면 올해 고추 값은 작년의 반 토막도 안 될 거야!”

“잣나무에 잣도 많이 열렸던데, 해거리(한 해 건너뜀) 때문인가요?”

“해거리는 무슨. 작년 겨울이 추웠잖아!”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밭에서 작업하는 부지런한 농부들.

 

벌써 붉은 고추가 매달리기 시작한 물골 고추밭. 농약 치는 농부는 땀을 닦으면서 약통을 내려놨다. 올해 화촌을 비롯 강원 영서지방은 옥수수나 호박, 고추가 풍년이다. 성숙기인 6월에 비가 집중되고 이후 해가 뜨는 날이 많아 기온이 오르고, 더구나 무작정 가문 게 아니고 오후에는 거의 사흘 건너 한 번씩 소나기가 내려 주니 밭작물과 숲에 나무들까지 성장에 최상의 조건이 된 셈이다.

“이 개울을 건너서 학교에 가셨겠어요.”

전국을 자전거 여행하던 중 경북 봉화의 법전을 지나 다덕재 밑에 이르니 중장비가 개울 정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이 모습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얼마 전 큰비가 내려 하천이 범람해 유실된 둑을 정비하는 중이었다. 수십 명 장정이 해야 할 일을 혼자 다 하는 중장비를 바라보며 뒷짐을 쥔 노인은 자신이 다니던 분교를 가리켰다.

“장마에 개울 건너다가 신발이 벗겨져 떠내려가기도 했지. 맨발로 집까지 걸어갔어.”

“저 다리가 없었나요?”

“없기는 왜 없어. 시멘트 다리를 만들기 전에는 봄에 낙엽송을 베어다가 양쪽에 걸쳐놓고 위에 가로로 나무토막을 얹은 뒤 그 위에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지. 그래도 큰비 한 번 오면 소용없어. 떠내려가면 또 놓고, 떠내려가면 또 놓고. 그러니 봄이면 다리 놓는 게 마을 사람들 행사였지.”

다리를 건너면 30분 걸리던 학교를 폭우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등교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읍내까지 내려가 국도 다리를 건너서 학교에 갔다는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과거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 분명했다.

 

햇볕에 고추를 말리는 시골 농가. 지금은 시골도 대체로 전기 건조기를 이용해 말린다.

 

임도 임시처방 말고, 그대로 둬라

숲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오래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의외로 많다. 그중 하나가 가을에 나무들이 씨앗을 배설하고 그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이다. 도광터 일상 중 하나는 매일 자전거로 임도를 타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새삼스럽게 숲이 유지되는 현상을 알게 되었다.

 

특히 교목들이 후손을 퍼트리는 방법은 참으로 신묘하다. 불이 난 자리에서 나무들이 성장하는 모습, 벌목이나 토목공사가 끝난 숲이 회복하는 과정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과 다를 것이 없다.

수년째 낡은 임도와 최근에 낸 임도를 돌아보며 배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임도의 경우 자연림에 길을 내느라 흙을 걷어내고 경사를 깎아내며 낮은 곳으로 흙을 돋우고 석축을 쌓으면 말 그대로 숲의 나무에는 천지개벽이나 마찬가지다.

새로 낸 임도를 가면서 마치 산이 찰과상을 입은 듯 황토빛 상처를 드러낸 부분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대부분 산에 오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거나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임도공사를 마치면 마치 수술 환자에게 진통제와 항생제를 투여하듯 강우에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싸리나무 씨앗 또는 풀씨를 뿌리거나 심하면 콘크리트 옹벽을 친다.

 

임도 절개지의 소나무 씨앗이 발아해 성장한 모습.

 

그러나 이것은 임시 처방이므로 자연의 이치에는 다소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공사 후 그대로 놔두는 것이 숲에 난 상처를 다스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절개한 경사나 맨땅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손님은 토종 소나무이다. 다른 어떤 활엽 교목도 씨앗이 안착할 엄두를 내지 않는 돌 틈이나 척박한 흙에 소나무 씨앗이 날아와 조용히 뿌리를 내린다. 이 현상을 보고 나서야 왜 바위 절벽에 유독 우뚝한 소나무가 많은지 알게 되었다. 많은 열매를 매달고 있으면서도 푹신하고 기름진 땅이 아니면, 그것도 땅에 묻혀 두 해 이상이 지나가야 싹을 내는 활엽 교목인 피나무와는 상반되는 특성이다.

 

내일부터는 선선한 아침에 터를 닦은 곳에 배추를 심기 위해 밭을 만들 작정이다. 엄씨 형님에게는 잘 숙성된 우분(소똥 거름)을 미리 부탁했다. 두 뼘 정도 깊이로 파서 돌을 뽑아내고 거기에 우분을 편 후 다시 흙으로 덮은 후 일주일 정도 놔둔다. 그러면 우분에서 나온 거름기가 충분히 흙에 배어든다. 마지막으로 쇠스랑으로 우분과 흙을 뒤섞어 비닐을 덮고 배추 모종을 심을 계획이다.

 

산을 깎아 새로 만든 임도.

 

봄에 중장비로 땅을 골랐는데 여름비에 단단하게 다져지면서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이 생겼다. 배수로는 물론이고 너무 경사진 곳에는 평탄화 작업도 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밭을 만들고 작물을 심는 것이다.

경사진 곳에 평탄화 작업을 한 후 그대로 방치하면 배수가 불규칙해지고 빗물에 경사면에 깎여나가거나 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양이 불규칙해서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산사태이다. 이것을 방지하는 방법은 바로 그곳에 뿌리가 튼튼한 작물을 경작하는 것인데 다랑논이나 계단식 밭을 생각하면 된다.

 

자전거 여행 중 만난 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의 시골 농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강아지가 촬영 모델이 되어주었다.

 

땅을 고르고 곡식을 심으면 뿌리가 습기를 보전하고 또한 급격한 빗물의 흐름이나 고임을 제어해 흙이 유실되거나 무너지는 걸 방비한다. 5월에 집 지을 터를 넓게 닦은 후 가장자리에 밭을 만들고 고추를 심었다. 물론 땅을 두 뼘 깊이로 파서 돌을 골라내고 작물을 심으니 그것이 자연스럽게 제방 역할을 했다. 덕분에 이번 비에도 끄떡없이 견디고 고추까지 풍성하게 열렸으니 살구나무에 돌 한 개를 던져 두 개의 살구를 딴 셈이 되었다.

 

산 생활이란 큰 진전은 없으나 부족하지 않으며, 만족할 만한 행복은 얻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언짢을 정도의 불행도 없다. 뒷밭에 나가면 호박과 가지가 충분하게 열려 있으니 그것만 가지고도 여름 한 철을 버틸 수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은 마르지 않으니 부러울 게 없다. 식생활은 간출해졌으며 목표를 위해 시간과 다투지 않는다. 밤은 늘 알맞은 높이와 편안함으로 나를 잠재우며, 숲은 폭포 같은 비와 뜨거운 햇빛조차 아무 저항 없이 껴안는다.

얼마 전 강원도 일원을 자전거로 여행한 지인이 도광터를 찾았다. 탈속한 나그네처럼 조용히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그를 보면서 더불어 내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전거 여행 중 만난 잘 정돈된 계단식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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