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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충절의 상징’ 채미정 품은 금오산

by 白馬 2021. 8. 2.

'한국의 명승’ 명산 구미 금오산
고려 말 길재 야은 은둔생활 기려… 조선 영조가 건립한 명승 52호

 

금오산 정상에 있는 약사암 주변 봉우리들이 마치 기운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 예사롭지 않다. 왼쪽에 얼핏 통신탑이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현월봉.

 

 

중국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만든 ‘채미가采薇歌’라는 노래가 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 신농神農과 우虞, 하夏의 시대는 가고/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은나라의 왕자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에 의해 나라를 잃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 배를 채우며 결국 굶어 죽었다. 그들이 죽기 전에 직접 지은 노래가 바로 ‘채미가’이다. 한 왕조에 충성을 다하면서 부정과 불의를 혐오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구미 금오산 입구에 채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금오산에서 내려온 냇가 옆 아늑한 정자에서 금오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고려 말 학자 야은 또는 금오산인 길재吉再(1353~1419)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68년 영조의 지시에 의해 건립됐다. 이어 숙종도 ‘좌사간길재左司諫吉再’란 제목의 오언구를 어필로 내려 채미정 뒤 경모각에 잘 보존돼 있다.

 

‘귀와오산하歸臥烏山下(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청풍비자릉淸風比子陵(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성주성기미聖主成其美(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권인절의흥勸人節義興(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함일세)’.

 

금오산 정상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에 조각된 보물 제490호 마애여래입상.

 

중국 백이·숙제의 채미가에서 유래 

고려를 배신하지 않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충절을 지킨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 채미정. 명승 제52호이다. 채미정도 중국 백이와 숙제의 채미가에서 유래했다. 실제 길재는 조선에서 태상박사의 관직을 받았으나 고사하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며 절의를 지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과 불충과 불의를 조장하고 가르치는 현대에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길재 스스로도 충절에 관한 시를 남겼다.

‘푸른 대는 봄이나 가을이나 절의節義가 굳고/ 시냇물은 밤낮으로 흐르면서 욕심을 씻는다/ 마음자리 밝고 맑아 때 묻지 않으니/ 이로부터 도의 맛이 달다는 것을 깊이 알리라.’

 

길재가 은둔생활을 한 금오산金烏山(976m)은 예로부터 산세가 예사롭지 않았던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도호부편에 ‘금오산은 고려 때에 남숭산南嵩山으로 불리어 해주의 북숭산과 짝을 짓는다. 고려의 길재가 이 산 밑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숭산이라 하면 예로부터 중국의 오악 중의 명산 중악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이 낙양과 서안을 도읍으로 삼을 때 진산이었던 곳이다. 고려 때 수도는 개성이니 개성의 인근 산을 북숭산으로 삼는 건 납득이 되지만 개성에서, 한양에서 한참 남쪽으로 떨어진 선산의 산을 남숭산으로 삼는 건 예사롭지 않다. 물론 여기에 중악 숭산은 전형적인 ‘토체의 산’으로서 평평하면서 황제가 나올 산이라는 의미를 지녀 금오산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남숭산이라는 별칭까지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느 산 못지않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선산도호부편에 ‘명산은 금오산인데, 산 북쪽 수구문동에 도선굴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국사가 수행하던 못池이라고 한다. (중략) 금오산석성은 높고 험한데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 반이나 된다. 둘레가 1,440보인데, 안에 작은 못이 3, 시내가 1, 샘이 4개나 있고, 또 군창이 있는데 개령·약목 군창의 물건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상주목편에는 ‘금오산이 있다’고, 권23 가례잡의편에서는 ‘충렬왕 원년 1275년 11월에 팔관회를 열었다. 금오산의 액호인 성수만세 4자를 고쳐 경력천추慶曆千秋라 바꾸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권50 열전 견훤편에 ‘동광 2년(924) 가을 7월에 (견훤의)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금오산성으로 추정)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금오산은 예로부터 낙동강 옆에 위치한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했고, 산세도 빼어나 풍수지리적으로 명산으로 평가 받아왔다. 낙동강 옆 평야지역에 우뚝 솟아 사방이 확 트여 조망이 좋을 뿐 아니라 산 모양이 준절 기이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고, 발길이 닿을 수밖에 없는 산이다.

 

채미정은 한 칸으로 건립된 정자다.

 

정상 봉우리가 현월봉懸月峰으로 명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달이 매달린 봉우리라는 의미다. 이는 강물은 맑고 달빛은 밝아 그림자가 강물에 비치면 고요하기가 옥을 담근 듯하고, 움직이면 금빛이 뛰노는 듯한 모습을 담아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 번 상상해 보라. 1,000m 가까이 되는 봉우리가 강물에 비친 모습을…. 그리고 옥빛 강물이 넘실거릴 때마다 달과 달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달과 봉우리가 하나 된 현월봉인 것이다. 현월봉 외에도 약사봉, 보봉, 남봉, 서봉 등 여러 봉우리가 금오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예로부터 유명 인사는 호도 많았고, 아름다운 산은 명칭도 많았다. 금오산도 위에서 언급된 명칭만 해도 와오산·남숭산 등이 있다. 이외에 원래 대본산이라 불렀고, 능선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와불산,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거인산 등으로 불렀다 전한다.

 

그런데 금오산이란 지명유래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 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췄으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해서 금오산이 됐다는 유래가 있다. 또 다른 설은,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이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명명하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 한 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무학대사도 금오산을 보고 “인물이 날 명산이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도선이 수행했다는 금오산 도선굴. 

 

금오산은 전략적 위치에 풍수적 명당

금오산은 이뿐만 아니라 도선국사가 수행을 했다는 도선굴, 수직 27m 높이의 폭포의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가 있다. 명금폭포는 이 지역 유일한 수자원으로 풍부한 물을 제공한다고 해서 대혜폭포 또는 대혜비폭이라고도 한다. 또 고려시대 때 조각된 보물 제490호 마애여래입상도 볼거리다. 암벽 모서리를 이용해 불상을 좌우로 나누어 입체적으로 조각했다는 점이 더욱 독특하게 보인다. 고려시대 제작됐지만 아직 선명하게 보존돼 있다.

 

고려 말 충신 길재 야은의 충절을 기려 조선 영조가 건립한 채미정 입구 흥기문과 다리. 다리 밑으로 냇물이 흐른다.

 

문화재청은 2008년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밝혔다.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1970년에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 금오산에서 자연보호운동을 주창했다. 이어 1978년 자연보호헌장을 제정 선포했다. 따라서 금오산이 자연보호헌장 발상지로 알려져, 자연경관도 어느 산보다 뛰어나다. 1983년엔 자연학습원을 개원, 지금에 이른다.

 

채미정 뒤편 경모각 안에 숙종이 내린 어필과 길재 야은의 전신상을 모셔 놓았다.

 

금오산에는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형주차장을 세 군데나 조성했는데 평일에도 세 곳 다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채미정 입구에 길재 야은이 고려를 그리며 지은 ‘회고가’가 돌에 새겨져 있다.

 

주요 등산로는

▲탐방안내소(관리소)에서 출발해서 대혜폭포~내성을 거쳐 정상까지 가는 코스는 4㎞ 남짓 거리로 약 2시간 소요된다. ▲탐방안내소에서 대혜폭포에서 내성 대신 성안을 거쳐 정상까지 가는 길은 4.4㎞로 30분가량 더 걸린다.

▲관리소에서 정상을 갔다가 법성사로 하산할 수 있다. 정상에서 법성사까지 2.7㎞. 법성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40분가량 걸리지만 정상에서 법성사로 하산하는 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면 된다.

▲안내소를 거치지 않고 경상북도환경연수원에서 바로 능선으로 올라 성안을 거쳐 정상까지 가는 코스도 4㎞ 남짓 된다. 능선이 조금 가팔라 3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관리소에서 법성사를 지난 향곡전망대에 차를 주차하고 효자봉~도수령을 거쳐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총 4.7㎞, 2시간 40분가량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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