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뛰어나 ‘백운’ 이름 가진 산 수십 개… 매천 황현은 무릉도원에 비유
흰 구름이 산을 덮고 있는 가운데 ‘흰 구름의 산’ 함양 백운산은 백두대간 능선으로 연결돼 있어 사방으로 능선이 뻗어간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산이름은 봉화산이다. 지방에서 한양까지 봉화를 피워 적의 외침을 신속히 전달하던 데서 유래했다.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뚜렷한 기능에 의해 명명됐다. 전국에 47개나 된다.
두 번째로는 43개나 되는 국사봉. 국가에서 봉화대를 세웠거나 정상 제단에서 기우제를 지낸 기능에서 비롯됐다. 봉화산과 이름은 다르지만 비슷한 기능을 가진 측면이 있다. 세 번째가 39개의 옥녀봉, 네 번째가 32개의 매봉산, 다섯 번째가 31개의 남산이다. 산의 형세와 위치에 따른 풍수적 개념에 가깝다.
하봉 비석은 자연석에 글자만 적어 놓고 있다.
백운산이 26개로 그 뒤를 잇는다. 2019년 조사한 국토지리정보원의 <산높이 및 위치정보>자료에 따른 결과다. 옛날에도 백운산은 많았다. 기록에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백운산이 20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백운산은 22개나 된다. 실제 함양 백운산 정상 비석에 ‘흰 구름산이란 뜻의 백운산은 같은 이름의 전국 30여 개 산 중에 가장 높고 사방이 탁 트인 훌륭한 조망대다. 산정에 눈과 구름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으로 행정구역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이다’라고 산림청에서 정리해 놓았다. 알려지지 않은 백운산까지 포함하면 26개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백운산이 왜 많을까’, ‘그 많은 백운산 중에 어느 백운산이 가장 유명했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함양 백운산은 그중에 어느 정도나 될까?
산을 연구하거나 지명에 관심 있는 전문가에게 백운산이란 지명유래에 대해 물어봤다. 전부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순히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는 ‘흰 구름이 아름다운 산’ 정도로 해석한다. 여기저기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숱한 문집 중에 <동주집東洲集>에서 유일하게 찾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시문집이다.
16세기 제작된 <동람도>에 백운산이 표시돼 있다. 위치상으로 조금 애매하지만 덕유산 아래 표시된 것으로 봐서 백운산이라 해도 무리없을 것 같다.
포천 백운산이 가장 빼어나고 그윽
‘사람들은 보통 푸른 산靑山, 흰 구름白雲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산이라고 산이름을 지은 경우는 적고, 백운산이라고 지은 경우는 많다. 대개 산은 주인이고, 구름은 객인데 객을 의지하여 주인을 형용하고 있다. 이는 산에 구름이 있는 것을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이다. 구름은 산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산은 체體이므로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구름은 용用이므로 피어나서 다함이 없다.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지만 경관은 새롭지 않고, 피어나서 다함이 없기 때문에 항상 변하여 경관이 더욱 아름다우니, 백운을 붙여서 산의 이름을 짓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우리나라 산 가운데 이름에 백운이 붙은 곳이 수십 개인데 오직 영평永平(포천의 옛 지명)에 있는 것이 가장 빼어나고 그윽하다. (후략)’
17세기 제작된 <동여비고>에는 함양 백운산이 확실하게 표시돼 있다.
여기서 백운이란 지명은 산의 기능이나 풍수와는 다른, 산 그 자체의 경관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체’와 ‘용’은 철학적이면서 불교적 개념이다. 또한 도교에서 말하는 도와 덕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불교에서 원래 마음 본바탕을 자성이라 하며, 이를 ‘체’라고 한다. 상황(불교에서는 경계라고 한다)에 따라 나타나는 형상을 용이라고 한다. 그러니 원래 산이라는 주인자리에 구름이나 비와 같은 손님이 만들어내는 자리인 경관은 경계와 같은 객체, 즉 용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경관이 나쁘면 백운이란 이름 자체가 명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원래 상태인 자연은 자성과 같은 상태로서 ‘체’이고, 구름과 같은 경계에 따라 나타난 형상이 백운으로서 ‘용’이 되는 것이다.
<동주집>에서는 백운의 유래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그 개념 자체가 워낙 철학적이어서 쉽지는 않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 문신인 이혁李爀(생몰연대 미상)은 그가 남긴 문집 <사례찬설>에서 전국의 유명한 백운산 여섯 개를 꼽고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백운산이 여섯 개가 있으니, 강원도 정선군 동면과 영월군 상동읍 사이에 있는 산(해발 1,426m),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 사이에 있는 산(1,279m), 전남 광양시 옥룡면·다압면 사이에 있는 산(1,218m), 충북 제천시 백운면과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사이에 있는 산(1,087m),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산(1,075m), 함경남도 함주군과 정평군 사이에 있는 산(1,078m) 등이다.’
이혁이 전국의 모든 백운산을 다 가봤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위에 언급한 여섯 개의 산도 제대로 답사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혁은 당시 가장 유명한 백운산으로 알려진 영평(현재 지명은 포천)의 백운산조차 빠트리고 있다. 의도적인지, 모르고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산의 족보를 정리한 <산경표>에는 백두대간 능선 상의 한 봉우리로 명확하게 나온다.
영평의 백운산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개인 문집에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특히 조선 최대의 사대부 집안인 김창협의 <농암집>에는 영평의 백운산만 기록하고 있다. 김창협이 벼슬을 버리고 백운산에서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허목의 <기언집>에도 영평의 백운산이 여러 군데 소개된다. 특히 동양 허씨라 불리는 허겸許謙(1270~1337)은 호를 ‘백운산인’이라 할 정도로 백운산을 사랑했다. 그는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해 백운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았다.
산에 대한 평가는 다소 주관적이다. 사람에 따라서 또한 다를 수 있다. 경관도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어느 시기에 어느 장소를 방문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체는 그대로지만 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 표현되고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백운산 하봉(앞에서 두 번째 봉긋 솟은 봉우리, 끝봉이라고도 한다)과 중봉이 나란히 솟아 정상까지 이어진다.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은 그의 개인문집 <매천집梅泉集>에 함양의 백운산만 소개한다. <매천집>제3권에서 ‘숙백전宿栢田’이란 제목의 백운산 관련 시 한 수를 남기고 있다.
‘영남 우도의 명산으론 백전산이 으뜸이니 嶺右名山首柏田
옛사람도 이곳을 작은 도원이라 하였었지 古人云是小桃源
구름 속에서 약초 캐니 고을이 많지 않고 雲間采藥不多里
솔 아래에 독서 소리 띄엄띄엄 촌락이 있네 松下讀書時有村
돌 홈통에 물이 졸졸 붉은 벼는 누워 있고 石梘水鳴紅稻臥
냉이꽃에 바람 부니 흰 죽을 흩뿌리는 듯 薺花風擺白糜奔(후략)’
신라 말 경애왕 때(924년) 최치원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한 암자로 전하는 상련대. 거의 900m 지점에 있어 올라가기 쉽지 않다.
함양 백운산 옛 이름은 백전산인 듯
함양 백운산의 다른 이름은 백전산이며, 백전산 계곡이 중국 <도화원기>에 나오는 별천지 무릉도원과 흡사할 정도라고 극찬하고 있다. 매천의 다소 주관적 평가일 수도 있지만 함양 백운산도 여느 백운산 못지않은 경관을 간직했던 듯하다. <택리지>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조금 소개된다. <택리지>는 함양을 토지가 비옥한 ‘산수굴山水窟’이라 평가하고 있다. 산수굴은 산이 높고 물이 많은 경치가 좋은 고장을 가리킨다.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지만 백운산이 높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도 매우 높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자연 물도 풍부하다.
위에서 언급한 백운산들의 공통점은 전부 1,000m 이상 높이의 산들이다. 흰 구름이 제법 그윽하게 내려, 백운이란 경관을 연출할 만한 장면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높이가 되어야만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함양 백운산(1,279m)은 영월 백운산에 이어 전국의 백운산 중에서 두 번째로 높다. 당연히 예로부터 나름대로 지명도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문헌이나 고지도에 기록이 남아 있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에 ‘(백운산은)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라고 나온다. 이어 ‘백운산에서 발원한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계곡을 뇌계檑溪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뇌계는 조선 초기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유호인(1445~1494)의 호이다. 유호인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있으며, 문장가로서 김종직 못지않게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사제관계 또는 친구로 지냈다. 그가 왜 뇌계를 호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으나 그의 본관이 고령이고, 함양군수였던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점으로 봐서 함양을 자주 왕래했으며, 또한 백운산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도 합천군수로 재직하면서 병사했고,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된 점으로 볼 때 함양 또는 백운산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뇌계는 높은 함양 백운산의 계곡에서 나오는 물을 보고 작명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 줄기에 덕유산과 육십치六十峙(지금 육십령)에 이어 백운산으로 연결된다. 안의安義 서쪽으로 삼십 리, 함양 서쪽으로 사십 리, 구례 동쪽으로 삼십 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산림청에서 조성한 함양 백운산 정상 비석.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지도 <동람도>에서는 위치상으로 조금 불명확하지만 덕유산 아래 백운산으로 표시돼 있고, 지리산 위에 있는 걸로 봐서 함양 백운산으로 봐도 별로 무리 없을 것 같다. 다만 함양에는 진산으로 백암산만 표시돼 있다.
17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에서는 <산경표>와 마찬가지로 ‘함양 사십 리’라고 표시돼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내려오다 육십령~장안산~영취산에 이어 백운산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봉우리 순서나 위치로 봐서 분명하다.
이와 같이 18세기 이후 제작된 고지도나 문헌에서는 어김없이 함양 백운산이 기록으로 나타나는 걸로 봐서 조선 선비들이 활발히 찾았거나 제법 명산으로 전국에 알려졌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도 기록이 남을 수 없다고 판단된다.
1861년 제작된 <대동전도>에는 함양 백운산이 확실하게 표시돼 있다.
백두대간 능선 따라 정상 밟을 수 있어
함양 백운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 조망이 확 트인다. 오르는 내내 나무가 우거져 조망을 할 수 없으나 봉우리에 올라서면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봉우리마다 이름 그대로 ‘흰 구름 산’과 같이 구름 낀 백운산을 즐길 수 있다. 봉우리는 하봉(끝봉이라고도 한다)~중봉에 이어 정상으로 이어진다. 하봉이 1,274m로 정상 봉우리와 불과 5m 차이밖에 안 된다. 따라서 봉우리에 오르기까지 등산로는 매우 가파르다. 하봉에 오르고 나서는 거의 평탄한 길로 정상까지 걸을 수 있다.
등산코스는 세 갈래로 나뉜다. 정상 안내도에 접근코스가 세 갈래로 표시돼 있다.
▲첫 번째 코스는 함양 대방마을에서 출발한다. 대방마을에 백운산 등산안내도라고 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대방마을에서는 묵계암 가는 코스와 백운암 가는 코스 두 갈래로 나뉜다. 대방마을에서 묵계암까지 1.5㎞가량 된다. 조금 가파르지만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다. 그만큼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묵계암에서 바로 능선을 치고 올라가서 정상까지 가는 코스 2.2㎞와 상련대上蓮臺를 거쳐서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 2.4㎞ 이정표가 나온다. 상련대는 거의 해발 900m 가까이 위치해 두 코스 모두 가파르기는 도긴개긴이다.
상련대까지 시멘트 포장도로이고, 능선은 산길로 가는 차이일 뿐이다. 하봉까지 평지 한 번 나오지 않는 끝없는 오르막이다. 백운암까지는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다. 백운암을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을 타고 산행이 시작된다. 계곡 암반 위로 흐르는 물은 옛 명성만큼 옥류다.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 보존이 잘 된 편이다. 계곡을 타고 한참 오르면 용소가 나온다. 용소부터 가파른 정상길이 계속된다.
▲두 번째 코스는 서하면과 백전면의 경계인 빼빼재(원통재라고도 한다)까지 승용차를 운행해서 갈 수 있다. 주차 지점에서 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오른쪽은 괘관산으로 가는 능선길이며, 왼편 절개지에서 밧줄을 잡고 오른다. 이후로는 정상까지 계속 능선 오르막길로 산행하게 된다. 절고개~서래봉을 거쳐 정상에 오른다.
▲세 번째 코스는 백두대간 능선인 전북 장수군 무령고개에서 오르는 코스다. 무령고개로 743번 지방도가 지난다. 능선 첫 봉우리가 영취산(1,076m)이다. 이후 백두대간 능선 따라 걸으면 백운산 정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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