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걷기-서산 아라메길]
왕벚꽃 가로수와 초록 구릉의 반영이 아름다운 신창저수지는 유럽 알프스를 연상하게 한다.
충남 서산 아라메길은 바다의 ‘아라’와 산의 ‘메’가 합쳐진 말로 바다와 산이 있는 길이라는 이름이다. 서해의 푸근한 바다와 나지막한 산세가 아름다운 길이다. 계절의 여왕인 봄에 걸으면 더 없이 멋진 길이 가득하다. 개심사, 해미읍성, 청정 가로림만 갯벌, 가창오리의 군무가 펼쳐지는 철새도래지, 서산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팔봉산, 바다 위에 핀 연꽃과 같은 간월도, 마애여래삼존상 등 서산의 다양한 볼거리를 돌아볼 수 있다. 총 6개 구간, 4개 지선으로 총길이는 약 126km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의 온화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한다
개심사와 문수사를 둘러 본 후 해미읍성에 들르고 바다가 갈라져야 들어갈 수 있는 웅도를 걸으러 갈 계획이었는데 개심사 앞에서 아라메길 안내도를 보고서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웅도 걷기 계획을 아라메길 1코스로 변경했다. 걷기와 산행을 한 지 10년, 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젠 걷기 코스만 보아도 이 길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 특히나 서산은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불교문화가 곳곳에 숨 쉬고 있어서 문화재를 만나며 쉬며 놀며 공부까지 할 수 있다.
아라메길 1코스엔 봄꽃의 여왕으로 불러도 손색없는 겹벚꽃과 청벚꽃이 유명한 개심사, 알프스 목장을 연상케 하는 신창저수지, 천진난만 미소를 짓는 마애여래삼존상, 천주교 순례지이자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인 해미읍성 등이 있어서 가족여행지로도 손색없다.
개심사 대웅전 앞 오층석탑 뒤편 철쭉도 겹벚꽃만큼이나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알프스를 연상케 하는 신창저수지
몇 해를 기다리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혼자 속앓이만 했다. 개심사의 겹벚꽃(왕벚꽃)의 명성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올해는 꼭!’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드디어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 가는 길에 신창저수지의 풍광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저수지 주변으로 펼쳐진 초록의 구릉지대는 마치 알프스 목장 같았다. 개심사 가기 전에 이곳을 먼저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큰 났다.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 사이로 분홍빛 겹벚꽃 가로수들이 줄을 지어 있다. 겹벚꽃이 신창저수지에 비친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곳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저수지 가운데 있는 다리는 그 풍경을 한층 완성시켜준다. 개심사로 향하던 차량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더니 겹벚꽃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개심사의 서막은 신창저수지가 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호수 주변의 구릉마다 만들어진 좁은 길이 나의 가슴을 더욱 설레게 했다. 저곳을 걷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상상으로 끝난다. 이곳은 모두 ‘출입금지’. 국내 씨수소의 정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 허락되지 않은 그곳에서 나물을 뜯는 이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보호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에도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사는 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창저수지 너머엔 벚꽃사진의 대명사로 부르는 용유지가 있지만 그곳 또한 출입금지이다.
유독 진한 핑크빛으로 만개한 개심사의 겹벚꽃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소박한 절간에 벌어진 봄꽃 잔치
‘마음을 열면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는 개심사의 주차장엔 이른 아침시간인데도 차량이 꽤 많았다. 선보러 가는 아가씨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섯 빛깔 겹벚꽃은 개심사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가끔 한강에서 마주하곤 했지만 초록의 청벚꽃은 그 느낌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행히 겹벚꽃이 절정이다, 개심사 곳곳에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세심동 개심사洗心洞 開心寺’ 표석이 보였다. 개심사로 들어설 때는 모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열린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개심사 일주문을 지나니 돌계단 양편엔 소나무들이 가득하다. 이른 아침의 숲 냄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던 몸도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솔숲 사이를 10분 정도 걸으니 개심사 경내이다. 심검당 앞의 철쭉과 자목련, 선방 앞 골담초까지 참으로 멋진 공간이다. 어린아이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꽃송이는 여러 가지 색의 꽃잎들이 가득 차있다. 마치 솜사탕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는 꽃송이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 떨어질 것만 같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른 시간임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로 꽃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음이다. 사진 한 장을 찍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경내 아래쪽 연못엔 다리 위에서 인생사진을 건지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비추인 반영이 참 아름답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드디어 청벚꽃이다. 개심사에서만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청벚꽃 앞의 인파행렬이 어마어마하다. 청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듯하다. 누군가에겐 청포도, 누군가에겐 풋사과처럼 보이는 청벚꽃을 깊숙이 들여다 보았다. 그 매력에 빠져서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꽃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거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래도 꽃이 좋다.
개심사에 이어 찾은 문수사. 들어가는 입구부터 양쪽 길에 늘어선 겹벚꽃이 장관이었다. 영화의 엔딩 장면으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지다. 개심사와 같은 겹벚꽃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가지가 꺾일 만큼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다. 산사를 물들이는 겹벚꽃은 초파일 연등과 함께 더욱 화려했다.
겹벚꽃 나무 행렬의 끝자락에선 마치 드라마 무대처럼 멋지게 꾸며진 철쭉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주인공인 겹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기중심을 지키며 꿋꿋하게 조연의 역할을 아주 멋지게 소화하고 있다.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철쭉을 지나서 문수사로 들어서니 산사 주변에 있는 키 작은 단풍나무들이 시선을 끌었다. 화려하지 않고 꽃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본당 앞을 지나서 뒤쪽 산으로 오르는 길 옆에 벚나무의 군락지.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 땅에 떨어진 꽃잎들이 작은 시냇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냇물에 몸을 의지하고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들. 내년 이맘때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나러 가는 돌계단 길에선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백제의 미소를 따라 걷다
아라메길 1코스의 시작지점인 운산면 여미리로 향한다. 아라메길 1코스는 유기방가옥을 시작으로 해미읍성 주차장까지 18km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역사와 함께 걷는 코스이다. 유기방가옥에서 시작한 길은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보원사지를 거쳐서 불교문화와 함께 산림으로 우거진 용현계곡과 가야산 줄기를 걷고 개심사를 지나서 해미읍성에 도착하면 끝난다.
여미리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늦봄 4월 달빛이 아름답다는 ‘여월미야餘月美也’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4월 달빛을 받으며 이 길을 걷는 느낌은 어떨까? 처마 밑에서 햇살을 받으며 꾸벅 꾸벅 졸고 계시는 할머님 한 분이 영락없는 친정엄마 모습이다. 정겹고 반가운 모습에 멀리서나마 손을 흔들었다. 유기방가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되어가는 시간. 요즘 해가 길어서 일몰시간이 늦으니 빨리 걸으면 해지기 전에 해미읍성에 도착할 거란 마음으로 출발했다.
유기방가옥은 1900년대 초 건립된 일제 강점기의 가옥이다. 고풍스러운 고택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초봄이면 움트기 시작하는 노란 수선화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유기방가옥에서 나와 언덕으로 조금 오르면 거대한 비자나무가 있다. 높이가 20m에 달해 한 장의 사진으로 담기에 힘들 정도다. 이 나무는 1675년 제주도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따뜻한 제주의 기후에서 살던 비자나무가 고통스러운 추위를 이기고 이곳에서 뿌리내리고 살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까?
한때는 100여 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던 천년고찰 보원사지.
유기방가옥을 벗어나 임도길을 조금 걷다 보면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미리 석불입상이 자리한다. 1970년대 상류지역에 2개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가 불상을 든든하게 보호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운현궁을 본떠서 건축한 유상묵가옥이다.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하고 외부에서 담장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임도에서 소나무만큼 키 큰 엄나무를 만났다. ‘맞다. 이곳이 엄나무 재래식된장이 유명하다고 했었지.’ 길을 걸으면 눈에 보이는 사물에서 어디엔가 남아 있던 희미한 기억들이 소환된다.
여미리가 끝나가는 지점부터는 용장천을 따라서 천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이다. 천변엔 아기 손처럼 작고 낮은 꽃잔디가 봄바람에 몸을 의지하고 팔랑거린다. 30여 분 천변을 따라 걷고 나서 고풍저수지를 지나니 마애여래삼존상으로 향하는 용현계곡이다. 예부터 용현계곡 입구는 중국에서 넘어온 사신이나 상인들이 통과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여래삼존상. 온화한 미소로 반겨 주는 마애여래삼존상앞에 서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국내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의 최고작품이라고 한다. 마애여래삼존상을 내려와 용현골을 따라서 용현자연휴양림 방향으로 걸으면 운동장처럼 널찍하게 펼쳐진 터가 있다. 바로 보원사가 있던 곳이다. 보원사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번창했던 천년고찰로 한때는 100여 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몇 개의 탑과 절터만이 남아 있다. 용현계곡 입구에서 보원사지까지 오르는 길은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보원사지 뒤편 가야산 자락으로 들어서니 이미 늦은 시간이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붓다가야에서 이름을 따온 ‘가야’산 줄기가 넓게 뻗은 보원사지 인근은 ‘가야’를 뜻하는‘상왕산’ 줄기이다. 보원사지에서 개심사로 가기 위해서는 상령고개를 넘어야한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을 끝없이 오르고 올랐다. 우거진 소나무 숲이 쉬어가기엔 더없이 좋은데 마음만 남겨두고 발걸음은 총총!! 가야산 정상과 개심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개심사 이정표를 보고서 하산 길로 접어드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코끼리의 등짝처럼 완만한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멋진 숲속 산책길이다. 빨리 걸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일몰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나무에 가려서 사진은 꽝! 눈으로만 즐감하고 하산 길을 재촉했다.
보원사지에서 개심사로 향하는 상령고개로 오르는 초입에서 서산아라메길의 두 정승이 반겨준다.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서려 있는 해미읍성
드디어 개심사. 이미 오전에 다녀왔으므로 마음 편하게 해미읍성으로 향한다. 해미읍성까지는 5.2km. 오학리로 향하는 임도 길은 나무도 많고 걷기도 편했다. 하늘엔 휘영청 달빛이 길을 밝혀 주어 랜턴 없이도 걸을 수 있다. 일명 달빛트레킹이다. 바람까지 솔솔 불어 주니 금상첨화다. 임도에서 산의 능선으로 들어서 자락을 걷는 길이 상쾌하다. 울창한 숲으로 들어섰다. 한낮이라면 소나무 사이로 들어서는 햇살이 참으로 정겨울 텐데 지금은 달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오학리 정자에 오르니 해미읍의 야경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잠시 쉬면서 해미읍 야경을 즐기고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굴다리를 통과해서 산길로 오르니 멀리 해미읍성의 윤곽이 드러났다. 아라메길 1코스 종착지인 해미읍성에 도착하니 GPS상 거리는 23km에 가까웠다. 아라메길 안내에는 18km. 시간계획을 18km로 잡았으니 생각보다 도착시간이 늦어졌고 해미읍성 문은 꼭꼭 잠겨 있었다.
다음날 다시 해미읍성을 찾았다.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다. 해미읍성은 조선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이었는데 산의 지형을 이용해서 지었다. 긴 타원 모양의 해미읍성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잠실운동장의 5배에 달하는 성내 잔디밭에는 삼삼오오 소풍 나온 가족들이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입구로 들어오면 병영성답게 다양한 무기들을 전시해 놓았다.
북문 쪽 산책로에는 소나무 군락지인 향토 숲이 참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 사이로 작은 꽃밭이 있어서 걷는 이의 마음에도 봄바람이 살랑거리게 했다. 일요일이어서인지 가족들과 함께 찾은 이들이 많다. 해미읍성은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의 순례지이다. 천주교 박해 때 1,000명 이상 처형당했다고 한다. 해미읍성 중앙에는 350년이나 된 회화나무가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를 매달아 죽이거나 참수한 목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그대로 안고 살아온 회화나무가 참으로 씩씩하게 보여서 안쓰러웠다.
1코스 전체를 걷기가 조금 길다고 생각되면 마애여래삼존상~보원사지~개심사 또는 개심사~해미읍성 구간만을 걸어도 아라메길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숲과 함께 다양한 길을 걸었으니 길을 좋아하는 내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이정표나 안내판이 많지 않아서 지도앱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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