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독수리가 품은 통도사 ②
훼손되지 않은 영남 알프스엔, 숲 지킨 스님들 있다
통도사가 지어지기 전 그 터에는 아홉 마리 독룡이 살고 있었다. 여덟 마리는 내쫓았는데 그중 한 마리 용은 연못에 있게 해주면 절을 지키겠다고 하여 남겨 두었다. 구룡지 전설이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산하는 민둥산과 벌거숭이 숲 천지였다. 조선왕조 말기와 6·25 전쟁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의 산이 헐벗은 시절에도 사찰 숲만은 울창했다.
천리포수목원을 세운 민병갈 원장 자서전을 보면 1950년대 한국의 처참한 산림 현실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 가운데 ‘전쟁과 땔감·식량을 구하기 위한 무분별한 벌목으로 전국의 산과 숲이 몸살을 앓았지만 사찰 주변 숲만은 보전 상태가 양호하다’고 감탄하는 대목이 있다. 민 원장은 숲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스님들의 노력을 꼽았다. 절마다 산감을 두고 숲을 지켜낸 결과였다.
통도사 역대 고승들의 사리탑과 탑비를 봉안한 부도전.
전국이 민둥산인데도 사찰림은 건재
근대 한국 불교의 선지식인 경봉 큰스님은 관청에서 통도사 경내 소나무를 베려 하자 직접 노구를 이끌고 나와 막았다고 한다. 스님은 경내는 물론, 사찰림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다. 태어나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말없이 서있는 수목 한 그루조차 가볍게 여기지 않았던 스님의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영남 알프스가 지금과 같은 자연환경을 지켜 오며 산악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영축산 통도사와 가지산도립공원 내 170여 개 말사들이 ‘산감’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통도사 산문에서 바라보면 독수리 머리 모양의 영축산(1,058m) 정상이 보인다. 독수리가 양 날개를 활짝 편 채 품안에 절을 안고 있다. 통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의 본사이며, 전국 100여 개 말사와 국외 10여 개 포교당을 관장하는 큰 절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1375년 역사를 집대성한 <신편 통도사지>.
중국 스님들도 경배한 佛寶 사찰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대웅전 뒤편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절이 있었지만 잦은 전란과 공산혁명의 와중에 대부분 파괴되고 유실됐다. 그래서 중국 스님들이 통도사까지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갖추기도 했다고 한다. 통도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불보佛寶사찰인 이유이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때 사세寺勢가 더욱 커져 선종 때(재위 1084~1094) 사찰과 마을의 경계표지라 할 수 있는 국장생 석표를 세울 만큼 대규모로 증축됐다. 장생 석표는 사찰의 경계 영역을 나타내거나, 살생 금지 등의 신성 구역을 표시하거나 부정한 액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솟대와 같이 마을 어귀나 사원에 세웠다. 이 장생이 훗날 장승으로 발전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신라의 자장율사에 의해 건축된 후 수차례 개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통도사 역사 집대성 <신편 통도사지>
통도사는 그 큰 규모만큼 한국 불교를 빛낸 수많은 고승과 문화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올해 초 1375년 통도사 역사를 종횡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신편 통도사지>가 2년 만에 완간됐다.
2책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사료집으로 편찬 도감을 맡은 광우 스님은 “통도사의 창건이념과 중심사상을 정리하고 1375년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승과 창건 이래 오랜 세월 창건과 중창을 거듭해 온 전각과 당우를 정리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통도사의 유무형의 유산을 기록하고 총림에 설립된 선원, 율원, 염불원, 강원의 역사를 대략 정리했다” 고 밝혔다.
“큰 절의 숲에는 승려들의 땀이 서려 있습니다”
통도사 광우 스님 인터뷰
억불의 시대와 남벌을 극복하고 사찰숲을 지킨 스님들을 말하다
“큰 절이 있는 산의 숲에는 사찰과 승려들의 땀이 서려 있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노전爐殿(사찰에서 의식 전반을 책임지는 직책)과 영축문화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광우 스님은 수백 년간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산과 숲을 지켜온 절집과 스님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사찰림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왕실에서 하사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대부분 조정에 몰수당하게 되지요. 빼앗기기만 한 게 아니라 승려들은 지역紙役(종이 만드는 노역)과 잡역 등 갖은 부역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은 지역이었어요. 장경 경판 작업을 하다 보니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는데 조선 조정은 사찰에 과도한 지역을 부과해서 나중에는 지역혁파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찰도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자 계를 조직하는 등 경제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후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하게 된 사찰에서는 몰수당한 사찰림을 되사들입니다. 사찰림의 역사는 수난과 극복의 역사입니다.”
지역·잡역에 시달린 사찰
삶과 수행의 터전인 사찰림을 빼앗긴 조선시대 승려의 삶은 비참했다. 천민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고 빈 절이 허다했다. 불국사조차 조선 말기 사진을 보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사찰의 경제는 궁핍했다. 스님들은 탁발, 기도, 개간 등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 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스님들은 짚신 만들기, 목공, 종이 만들기 등을, 강원도 스님들은 품팔이를 했다. 통도사의 누룩 만들기는 경상남북 전역을 판매지역으로 하여 그 공급을 담당할 정도였다.
종교도 현실적 기반은 세속이니 만큼 활동과 존속을 위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통도사의 갑계(승려들끼리 조직한 계)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통도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보사補寺(사찰 지원)가 오늘날 통도사가 존재하는 토대가 됐다.
사찰과 숲을 지키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
“경전을 판각하고 인쇄해 엮어내는 작업이 중요한 일이었기에 통도사에는 뛰어난 종이제작 기술을 지닌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양반집을 지어주는 스님 목수들도 사찰경제에서 큰 몫을 담당했지요.”
광우 스님은 통도사 계모임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억불 정책으로 운영이 어렵던 조선 후기 사찰들은 산채나 과일 등의 특산물 채취와 제지사업 등을 통해 운영 자금을 충당했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어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승려들끼리 조직한 계를 갑계라 하는데, 주로 범어사와 통도사 등 경상도 지역의 큰 사찰에서 성행했습니다. 그렇게 십시일반 모은 자금으로 피폐해진 사찰의 중건과 교단 중흥을 이뤄내게 됩니다.”
광우 스님은 “사찰림은 저절로 울창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는 저 아름드리나무들의 나이테에는 스님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찰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가꿔야 할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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