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산길…송전탑이 ‘등대’ [송전탑 산행]
장항선 도고온천역 9km 원점회귀 짧지만 기품 있고 깔끔한 산
가난한 산을 좋아한다. 으리으리한 전망데크나, 날아갈 듯 지붕을 치켜세운 팔각정 없어도, 가시 없이 순박해 고요한 산길 하나 내어 주는 산. 데크 계단은 고사하고, 유적 같은 이정표도 종일 걸어야 마주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산. 덕봉산이 그랬다. 덕봉산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 고라니와 마주쳤다. 녀석도 의외였던 게다. 덕봉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순간 마주보며 흐르는 1초, 2초, 3초. 세상에 고라니와 나만 남겨진 시간이 지나자, 고라니가 뒤돌아서 달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뜀박질이었다. 50m쯤 거리가 벌어지자 멈춰서 빤히 쳐다봤다. 고라니를 안심시키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 속으로 송전탑이 릴레이를 하며 뻗었는데,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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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산 서봉 송전탑 아래를 지난다. 송전탑은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전기를 통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다.
송전탑 산행지를 도고산~덕봉산으로 잡았으나 불안했다. 정보가 드물어 기사로 소개하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월간산 독자와 함께하는 취재 산행 전날, 답사 산행에 나섰다. 도고온천역에서 출발해 도고산과 덕봉산을 타고 신례원역으로 하산하는 열차 산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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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회귀 산행의 기점인 도고온천역. 찻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시작부터 덤불이다. 인터넷 산행기의 코스를 따라 도고온천역에서 곧장 137m봉으로 올라서자 산길이 희미해지더니, 옷이 뜯기지 않고서는 나아가기 어려운 지경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자연으로 돌아간 산길이다. “답사 오길 잘했다”고 주민욱 사진기자와 위로에 가까운 말을 하며 도고온천역으로 되돌아왔다.
도고산의 대표 들머리는 도고중학교. 역에서 찻길로 1.3km 떨어진 코스를 잡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바꿨는데,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의외로 뙤약볕 찻길은 걸을 만하다. 노란 폭설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아스팔트를 온통 만추晩秋로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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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중학교 정문 옆에는 대형 등산지도가 있어 코스를 가늠할 수 있다.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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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중학교 정문 옆으로 난 도고산 들머리. 동네 주민들은 대개 이 코스로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산행을 한다. 이 길 외에는 산길이 대체로 희미하다.
주차장과 화장실에, 대형 등산안내판에, 도고산 유래 해설까지. 도고중학교는 등산로 입구다워서 안도감이 든다. 학교 정문 앞 버스정류장에 있던 여학생이 넙죽 인사를 한다. 고개 숙여 답례를 하고 산길로 든다. 문득 ‘도道 고高’라는 이름이 와 닿았다. 도리가 높은 동네다.
덕봉산 정상을 포기하고 되돌아서다
485m 높이를 얕보았음을 실토하라고, 끈질기게 묻는다. 그런 산길이다. 가파른 계단으로 무언가를 계속 질문한다. 산꾼의 방식은 묵묵히 땀으로 답하는 것. 길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벤치와 평상이 잊을 만하면 나온다. 세심하게 관리한 것이 눈에 띄는 부잣집 산이다.
도고산 정상을 지나 덕봉산에 들자, 발길이 뚝 끊긴 듯하다. 최근 한 달 동안 사람이 온적 있을까 싶을 만큼 묵은 산길. ‘산길이 맞는 걸까’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솟구치는 길을 걸었다. 이정표와 표지기가 드문드문 있으나, 산길이 소멸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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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온천역에서 도고중학교로 이어진 길이 만추로 물들어간다.
선답자도 같은 마음이었을 터. 비교적 최근에 반질반질한 표지기를 달아 놓았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배려 깊은 그가 고맙다. 덕봉산 정상 쪽으로 방향을 90° 꺾어야 하는데, 갈림길이 없다. 가민 GPSMAP67을 들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자, 비로소 표지기 하나가 손 흔든다. 마법처럼 나타나는 희미한 산길. 올해 여기를 지나간 사람을 한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묵은 산길이다. 초집중해서 급경사를 내려서자 임도다. 해일 같은 덕봉산의 고요가 덮친다.
예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인 덕봉산德鳳山(474m)은 옛날 난리가 났을 때, 이 산에 피한 사람만 무사해서 덕을 많이 봤다는 뜻으로 ‘덕본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능선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깊이 있는 적막함이 주는 편안한 기류가 피부를 감싼다. 단순한 숨결만 남아 능선의 흐름과 하나가 된다. 바위도, 전망데크도 없는, 가난한 덕봉이네 시골집 같은 산길이 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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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산에서 수철리 천주교 공소로 내려서는 길에 본 만추의 송전탑. 취재 산행 전날 답사 산행으로 덕봉산에 올랐으나, 기사로 소개하기에는 미흡해 중도에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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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산 북릉의 송전탑을 지난다. 송전탑이 있는 곳은 보통 트여 있는 곳이 많아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 경치를 즐기기 좋다.
정상을 앞두고 발길을 되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기사를 써서 추천하기에는 미로 찾기에 가까운 산행이라, 극소수 마니아들만 좋아할 산이다. 지는 햇살을 붙잡으려 임도에서 수철리로 방향을 꺾었다. 철탑과 전선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듯, 멀리 뻗어 있어 안심되었다. 이정표의 ‘수철리공소’ 방향을 따라 가는 길, 고라니와 만났다.
고요한 공기로 샤워한 덕분에 걸을수록 평온해졌다. 드디어 나타난 마을길, 정갈한 잔디밭에 흰 옷 입은 여인이 서있다. 산촌 마을 꼭대기의 수철리공소는 성당이었다. 노을이 무척 고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거룩한 시간. 성모마리아 상에 인사하고 생수병을 꺼내 실컷 물을 삼켰다. 덕봉산 덕인지 사물이 좀더 부드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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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깊게 쌓인 도고산의 만추를 즐기는 김광명·김지유씨. 도고산은 벤치와 평상이 곳곳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정비가 잘되어 있다.
마라톤 풀코스를 세 번 완주한 김지유씨, 100km 트레일러닝을 완주한 김광명씨와 함께 다음날 도고온천역을 나선다. 막강한 여성 독자들과 함께여서인지 전날보다 몸이 가벼웠다. 대중적인 코스 소개를 위해, 덕봉산을 포기하고 도고산 원점회귀 코스를 잡았다.
어제 한 번 왔다고, 도고중학교가 모교처럼 반갑다. 초면에 허리 숙여 인사하던 예의바른 학생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침 햇살이 횡으로 숲길을 관통한다. 떨어지는 먼지 한 가닥도 보일 것 같은 깨끗한 숲. 도고중학교의 고도가 30m, 곧장 고도 450m를 높여야 한다. 복습하는 산행이라 호흡이 어제보다 여유롭다.
그냥 동네 뒷산으로 여기기에는 소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가 우아한 몸짓이다. 산세가 낮지만 힘이 있어, 전반적으로 귀품이 있다. 화려한 암릉이 없어도 정갈하고 고소한 맛이 있다. 1390년 고려시대 기록에 의하면 왜구가 서해로 침입해 도고산에 진을 치고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에 관군이 왜적 100여 명을 죽이고 소탕했다고 한다. 배를 타고 곧장 도고산으로 들어왔다는 맥락인데, 도고산은 원래 바다 곁에 있었다.
푸근한 산마루 굴곡이 동화 같아
삽교천 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산기슭이 해안선이었다고 한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도 서해에서 삽교천을 타고 거슬러오는 배를 살피기 위해서라고 한다.
왜적을 소멸하고 2년 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다. 이에 고려에서 벼슬을 지낸 김질에게 조선에서 벼슬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도고산 자락에 은거하다 순절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산시에서는 산세가 바르고, 의연함이 높다는 의미로 산 이름을 풀이하기도 한다.
이틀 내내 고요함이 촉감 좋은 옷처럼 몸을 감싼다. 어제 하루 동안 두 명을 마주쳤고, 오늘은 아직 마주치는 이가 없다. 존재감마저 없지는 않다. 도도하여 숨 돌릴 만하면, 가파른 산길이 해일처럼 덮쳐온다. 하지만 덕스러워, 박자를 타며 숨 돌릴 완만한 길을 번갈아 준다.
강약중강약으로 산행의 속도를 능수능란하게 변주한다. 한 템포 끌어올려, 칼날바위에서 속을 뻥 뚫어놓는다. 시원한 바람과 맛깔스런 경치. 소박하지만 깔끔한 도고의 맛이 시선을 타고 속으로 번진다.
쉼터로 제격인 팔각정을 지나자, 정상이다. 흙이 많은 육산답게 편안한 정상이지만, 경치까지 약하지는 않다. 북쪽으로 논밭과 건물이 주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의외로 첩첩산중 푸근한 산마루 굴곡이 동화 같다. 거창하지 않지만, 약하지 않다. 전자파 측정 산행이 궁금한 김지유씨가 측정기를 켜자 정상에서 0.04mG밀리가우스가 표시된다. 거의 자연 그대로의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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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지켜내는 진격의 거인, 송전탑을 만날 시간이다. 도고산 정상은 엄밀히 보면 쌍봉인데 무명봉인 서쪽 봉우리에 송전탑이 있다. 숲을 빠져나오자 불쑥 드러난 송전탑. 김지유 독자의 “파리 에펠탑 같아요”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지탱하는 전기의 거인은 거대한 직선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터가 넓고 평평한데다 경치까지 드러나 쉬었다 가기에 안성맞춤이다. XYZ 3축 측장기인 ‘TM-192’로 측정한 전자파 수치는 9.82mG. 놀란 표정의 김지유 독자에게 국내 전자파 안전 수치가 833mG이고, 국제 기준이 2,000mG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안심한다.
국내 기준의 80분의 1쯤에 해당하는 수치인 것. 집에서 수치를 확인해도 10mG를 넘는 곳이 여럿 있었는데, 단순히 철탑의 겉모습에 두려움을 갖게 되면 지극히 낮은 수치인 10mG이 공포로 둔갑한다.
의문이 해소되자, 핑크빛 진격의 거인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전선을 따라 능선을 갈아탄다. 방향을 꺾어 서북릉을 탄다. 이정표와 벤치, 표지기는 선명하지만, 낙엽이 절정에 이르렀다. 디딜 때마다 20~30cm씩 푹푹 들어가는 낙엽 능선. 낙엽의 망망대해를 하늘에 매달린 전선을 등대삼아 걸었다.
낙엽의 심해로 가라앉았다가 올라서자 두 번째 핑크빛 거인이 출현한다. 관리자들은 어떻게 저 높은 곳에 올라갈까 궁금했는데, 자동으로 오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전자파 측정 수치는 16.6mG, 김지유·김광명 두 사람의 표정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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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산은 등산객이 많지 않고 화려한 암릉구간이 없지만, 조용한 당일산행 코스로 권할 만하다.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송전탑 전선을 따라 높은 도리의 산을 내려갔다. 한때 서해와 닿아 있었다는 산은 내륙의 산이 된 지 오래. 간혹 바다였음을 기억하는지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와 낙엽을 포말처럼 일으켰다. “두 왕을 섬기지 않겠다”했던 김질의 고지식한 의연함이 낭만적인 춤을 추는 듯했다.
평범한 시골 임도로 쏙 떨어지는 하산길. 도고산이 반듯하게 허리를 굽혀 작별 인사를 하고, 덕봉산이 “멀리 안 나가유~”라며 둥근 어깨를 들썩인다. 하산 후에도 송전탑은 끝나지 않았다며, 아득히 먼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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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산 정상. 무인산불감시탑과 정상 표지석이 있다. 북쪽과 동쪽으로 경치가 트이는 도고산의 명소다.
Ttt 도고산 송전탑 전자파 수치는?
국제 전자파 유해 기준은 2,000mG(밀리가우스)이고, 국내 기준은 이보다 훨씬 엄격한 833mG이다. 측정기 TM-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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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인터넷 지도를 비롯한 등산지도에 도고온천역에서 137m봉을 넘어 도고산 북릉으로 연결되는 산길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현지 확인 결과 산길이 없다. 이정표가 있으니 과거에는 있었던 길이지만, 지금은 옷이 뜯겨져 가며 개척산행을 감행하지 않는 이상 진행이 어려운 상태다. 도로를 따라 걷더라도 도고중학교를 기점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도고중학교에는 주차장과 화장실, 대형 등산지도가 있어 들머리로 제격이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산길이 선명하고 이정표가 많아 길찾기는 쉽다. 정상 이후부터 산길이 희미하다. 다만 산길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며, 노란 표지기와 이정표가 있어 주의하면 어렵지 않게 북릉 주파가 가능하다. 마을 임도에서 찻길을 따라 1.3km 걸어야 도고온천역에 닿는다.
도고중학교의 고도가 해발 30m, 정상이 485m이므로, 고도 450m를 높여야 한다. 정상까지는 비탈이 많아 너무 만만히 보면 어려울 수 있다. 숲이 짙은 육산이며 칼바위, 팔각정, 정상, 송전탑에서 경치가 트인다. 덕봉산은 산길이 무척 희미하고, 트인 곳이 없어 대중적인 산행지로 권하기 어렵다.
교통
지하철 1호선 종점 신창역에서 도고중학교까지 8km 거리이다. 버스가 하루 1~2회 운행하므로 택시를 타고 들머리까지 가는 것이 효율적이다. 도고온천역은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해 영등포역을 거치는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8회(05:32~20:43) 운행한다. 요금 7,700원. 1시간 45분 소요. 도고온천역에서 영등포역을 거쳐 용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8회(07:30~22:14) 운행.
맛집 (지역번호 041)
도고온천역 앞보다는 도고온천단지가 있는 기곡리에 식당이 많다. 순천향대학교가 있는 1호선 신창역 부근도 식당과 편의시설이 즐비하다. 도고온천역 앞에는 찌개류 전문인 교차로기사식당(544-5044)이 있다. 도고온천에는 즉석두부촌식당(541-2112), 달거니해장국(543-2228), 최연희추어탕(542-8822), 농가왕우렁쌈밥(547-47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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