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선 타고 떠나는 진짜배기 ‘재원도’ 여행
임자도를 여행하고 다리 건너 지도읍 점암선착장으로 나왔을 때, 문득 떠오르는 섬이 있었다. ‘재원도’. 10여 년 전 딱 한 번 가 본 뒤, 추억으로 새겨 놓았던 섬이다. 마음만 먹으면 옛 섬에 대한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바꿀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 매표소로 달려가 덜컥 배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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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길까지 추억 소환
재원도는 신안군의 북단 임자도 뒤편에 숨어 있는 섬이다. 2021년 임자도가 연륙 되면서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첫 섬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재원도로 가는 방법은 훨씬 수월해졌다. 임자도 서쪽 목섬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10분만 배를 타면 끝이다. 그런데도 점암선착장에서는 여전히 1시간이 걸린다. 물론 섬사람들을 위한 배려라지만, 그 덕에 기억을 소환할 좋은 기회를 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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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임자도를 잇는 다리가 놓인 후 섬사람들의 육지 나들이가 편해졌다
섬사랑 3호가 임자도 남쪽 해안을 돌아 재원도항에 입도했을 때, 달라진 게 없는 선착장과 마을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관광객이 전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섬’이라는 10년 전의 첫인상이 데자뷰되는 듯했다. 느리게 흐르는 ‘섬 시간’이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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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작고 마을은 하나뿐이지만 100여 명의 주민이 정답게 살아간다
재원도에서는 해방 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민어와 부서(굴비) 파시가 열렸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도록 이어진 파시였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덧, 재원도는 임자도의 큰 몸집에 가려 일반인에게는 존재조차 희미해진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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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도는 큰 섬 못지않은 백사장과 들고 남이 또렷한 해안풍경을 가졌다
유별나지 않은 여행에도 인심은 있다
마을은 유별나지 않은 여느 섬들을 닮았다. 문이 굳게 닫힌 슈퍼, 평일에는 손님을 받지 않을 것 같은 민박도 예상했던 모습이다. 뭐라 딱 내세울 것 없는 어촌 섬마을의 전형적인 풍경, 스폿이라고는 팽나무 두 그루가 날씬하게 버티고 선 당숲과 본섬과 제방으로 연결된 상월항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여행이 서먹한 섬에도 설렘은 있다. 어쩌면 내가 재원도의 유일한 이방인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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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숲도 본디 나무가 많았지만, 현재는 팽나무 2~3그루만 남은 단촐한 모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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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메기는 썰물과 밀물을 이용한 가장 게으른 전통 고기잡이 형식이다
마을 앞 바닷가에는 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놓고 그물을 걸어 둔 개막이가 설치돼 있다. 밀물 때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썰물 때 잡아내는 전통 고기잡이 방식이다. 마침 그물을 살피러 다가간 아주머니가 허탕 친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우리 집 닭이 낳은 계란인디, 삶아 잡술랑가?” 주민 한 분이 냄비 가득, 청란을 내미는 게 아닌가. 마침 슈퍼의 문이 닫혀 난감하던 차에 귀한 식량이 생겼다. 감사하다며 돈을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사양하시더니, 카메라를 슬쩍 보고 말씀하신다. “우리 재원도, 이쁘게 찍어 보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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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도는 80년대 말까지 민어와 부서파시가 열렸던 풍요로운 섬이었다
재원도의 숨겨진 보석, 예미해변
마을에서 오늘의 숙영지 예미해변까지는 약 4km 거리다. 섬 인심에 고무된 터라 배낭의 무게는 반쯤 줄어든 듯 가벼웠다. 섬 허리를 따라 걷는 기분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바다와 숲이 번갈아 나타나는 길, 차량 통행마저 없으니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나무, 꽃투성이지만 민낯의 자연은 힐링 그 자체다. 재원도를 다시 찾은 까닭도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원도에는 몇 해 전 순환임도가 놓였다. 차량이나 도보로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된 것이다. 약 8km의 섬 둘레길,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명품 코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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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에 여행 못 할 곳은 없다.
드디어 예미해변, 샤워실을 겸한 화장실과 대형 데크가 설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예전 그대로다. 본디 섬 주민들만의 로컬 해수욕장이었던 이곳은 썰물이면 400m까지 백사장이 드러나는 중급 해변이다. 작은 풀등, 그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해넘이의 고즈넉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가히 재원도의 숨겨진 보석이라 할 만하다. 문득, 10여 년 전 지도를 탐색하다 찾아간 우리 일행을 위해 간이샤워장을 만들어 줬던 마을 분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인심 또한 재원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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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은 오지섬 탐방을 위한 가장 좋은 아웃도어 모드다
솔로 캠핑의 묘미
예미해변에는 모래언덕이 있다. 밀물 때도 바닷물이 닿지 않아 캠핑하기에 좋은 장소다. 게다가 화장실에 물까지 쓸 수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스틱을 폴대 삼아 미드 텐트를 피칭하고 매트리스와 침낭을 깔았다. 시크한 잠자리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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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모래 펄 또는 갯벌에서 서식하는 조개류다
푸른 저녁 빛이 내리자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다. 모닥불을 피우고 계란과 임자도 슈퍼에서 사 온 동죽을 삶았다. 그리고 티타늄 플라스크를 꺼냈다. 거기에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귀하게 마셔야 할 소주가 들어 있다. 흰자의 탄력에서 느껴지는 자연란의 신선함이라니. 갯벌에서 잡았다는 동죽도 살이 꽉 찼다. 내일 아침 식사 메뉴도 정해졌다. 동죽 국물에 미나미시마바라 소면을 풀고 남은 계란으로 후라이를 해 먹을 참이다. 술기운이 살짝 오르자, 고독과 편안함의 경계가 무뎌졌다. 솔로 캠핑의 묘미란 이런 것이다.
파도는 그날처럼 다가왔다 멀어졌고, 바람은 밤새워 텐트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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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바다가 주는 안정감
▶여객선
지도(점암, 봉리)/ 임자도(진리, 목섬) → 재원도 1일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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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