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경상도의 숨은 명산 오봉산] 선덕여왕이 말했다 “적이 옥문에 들어갔으니 맥을 못 출 거야”

白馬 2025. 6. 21. 07:26

오봉산 정상.

 

겨울인데도 옥문지에서 개구리 떼가 사나흘 울었다. 왕은 서쪽의 여근곡을 찾아가 숨어 있는 적병을 죽이라고 했다. 백제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었지만 몰살됐다. 예지력에 탄복한 신하들에게 선덕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개구리가 겨울에 시끄럽게 우는 것은 병란의 조짐이요, 옥문玉門은 하얀빛의 음부, 서쪽을 상징하므로 적병이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고 옥문에 들어가면 맥을 못 추니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오봉산은 해발 685m,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천촌리, 여근곡은 건천읍 신평리에 있다. 노천박물관으로 알려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남산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호젓한 산길과 바위 능선을 밟는 재미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천나들목을 나와 유학사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가 잘 정비된 곳이지만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경사 급한 구간이 있다. 능선에 오르면 전망대 지나 바위 지대와 임도 합류, 곧장 정상에 닿는다. 고즈넉한 주사암을 거쳐 마당바위에 서면 낭떠러지 주변 경관이 압권이다. 유학사 입구 원점까지 되돌아오는 데 6.5㎞, 3시간 넘게 걸린다.

오봉산 마당바위.

 

봄날의 절정, 초록 꽃의 향기

건천나들목을 나오니 산자락은 오후의 햇살 받아 영롱하다. 오후 3시 15분 옥문지로 여겨지던 유학사 입구(쉼터 0.9·부산성 0.8·정상 2.5km 정도), 오봉산 산행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초파일 앞두고 오색 연등이 걸렸다. 산벚·국수·신갈·생강·개옻·철쭉·진달래·쇠물푸레·고추·소나무. 절집 기와지붕을 왼쪽에 두고 오르는데 살랑살랑 봄바람이 좋다. 발아래 자줏빛 각시붓꽃, 사초, 산괴불, 현호색, 소나무재선충 무덤을 지나면서 향기가 코를 찌른다. 하얀 꽃잎을 매단 라일락으로 알려진 정향나무다. 가파른 산길 솜털처럼 나풀거리는 쇠물푸레나무 하얀 꽃, 덜꿩나무 꽃봉오리, 진달래꽃은 다 졌다. 15분 더 올라서 나무 계단 길, 땀이 나서 외투를 열어젖혔다. 숨을 할딱거리며 땀을 닦는다. 

 

초록의 새순이 절정인 오후 3시 45분, 멧돼지 다 뒤져놓은 신갈나무 숲, 야생동물들의 놀이터 지나서 곧장 안부 쉼터에 잠시 앉는다. 주사암, 옥문지 갈림길이지만 이정표에는 거리 표시가 없다. 정향나무 향기는 산천에 진동하는데 그다지 좋은 냄새는 아닌 듯하다. 잠시 후 신갈나무 낙엽 쌓인 길 왼쪽으로 비켜 오른다. 병꽃나무는 벌써 피었고 현호색, 산괴불, 당단풍, 산초나무. 오후 4시경 ‘오봉산 주등산로 제3지점’ 팻말이 섰다. 정향나무 향기는 쇳내가 섞였다. 지그재그 비켜 걷는 산길, 산 아래 고속도로 질주 소리, 소나무보다 신갈·당단풍나무 많은 숲길에 산불 조심 방송이 연거푸 들린다. 

숲 길.

 

오후 4시 10분, ‘오봉산 주등산로 제4지점’ 투구꽃, 산수국, 별꽃을 마주하는 능선 갈림길. 오른쪽은 주사암, 걸어온 길은 유학사 쪽이다. 5분 더 걸어올라 능선 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발아래 크고 작은 연못과 경부고속도로 너머 미세먼지가 부옇다. 

팥배나무, 분홍 진달래꽃과 철쭉꽃, 하얀 쇠물푸레꽃. 발끝에 기화이초奇花異草 만발하다. 분홍 산딸기꽃, 노란 양지꽃, 하얀 별꽃, 보랏빛 각시붓꽃…. 두어 개 봉우리 넘어 오르막내리막 산길 지나 오후 4시 30분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 합류 지점. 오른쪽 묘지 방향 ‘오봉산 주등산로 제8지점’이다. 코끼리 바위로 불리는 바위 지대까지 10분 거리. 산벚나무, 진달래, 철쭉꽃은 능선이라 그런지 이제 한창이다. 곧장 정상까지 한달음에 왔다.

 

주사암과 마당바위 전설

오후 4시 45분, 오봉산 정상은 시커멓고 평평한 바위다. 글자대로 다섯 개 봉우리 오봉산五峰山이다. 주사朱砂바위가 있다 해서 주사산으로 불렸는데 붉은 바위는 찾지 못하겠다. 신라 때 궁녀가 밤마다 바위에 홀려 새벽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오자 왕은 궁녀에게 바위에 붉은 표시를 하라고 일렀다. 다음날 괴롭히던 바위를 찾고부터 밤중에 나가는 일이 없어졌다 한다. 절 앞의 바위를 주사바위라 불렀고 주사암朱砂庵이 됐다. 의상대사가 세운 고찰로 조계종 불국사의 말사, 여기서 암자까지 5분 거리. 입구에 절집을 압도하는 바위가 일주문처럼 서 있다. 

오봉산과 여근곡(가운데).

 

바로 아래 마당바위에 올라서니 소름 돋을 만큼 깎아지른 절벽으로 오봉산 최고의 전망대다. 건너편 산기슭마다 산벚나무꽃은 물감을 흩은 듯, 초록의 도화지에 연분홍을 물들인 봄의 수채화. 바위 아래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저 멀리 첩첩이 겹친 크고 작은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 만학萬壑과 천봉千峯. 절벽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려 온다.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키우던 호쾌한 곳이다. 100여 명 앉을 만한 넓은 바위에 김유신 장군이 보리로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마시게 했다는 전설, 지맥석地麥石 이라고도 한다. 

 

바위 아래는 문무왕 때 쌓은 9.5㎞쯤 되는 부산성富山城이 있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 곳 없다더니 술 익는 시절이건만 주객酒客 없는 향연饗宴이다. 마당바위는 드라마 ‘선덕여왕’, ‘동이’ 촬영 무대.

 

산중의 절집은 고즈넉해서 좋다. 기둥에 걸린 주련 글자도 두루뭉술하고 암자는 투박하고 어리숙하게 생겨서 오히려 정감이 간다. 오후 5시5분경 다시 정상을 지나는데 산조팝나무 흰 꽃이 만발했다. 산길에는 팥배나무, 쥐똥나무는 곧 꽃망울 터트릴 기세다. 빠른 걸음으로 능선 바위 전망 좋은 곳으로 되돌아왔다. 오후 5시 20분. 진행 방향에 보이는 경주 남산, 뒤로 팔공산, 멀리 동쪽 토함산, 오른쪽으로 김유신 장군이 칼로 바위를 내리쳤다는 단석산斷石山, 낙동정맥은 왼쪽에 두고 걷는다. 오봉산은 낙동정맥에서 갈려 나온 산이다. 

바위 지대.

 

옥문지 여근곡 이야기

바위 낭떠러지 아래는 붉은 철쭉·진달래 꽃이 절정인데 발밑에 기차 소리 길게 흘러간다. 곧장 능선 갈림길, 꽃향기는 산 아래 바람에 실려 오고 우리는 봄날의 낙화 청춘, 왼쪽 유학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노란 꽃 산괴불, 보랏빛 현호색, 짓궂은 봄바람에 정향나무꽃은 하얗게 떨어진다. 상쾌한 냄새만은 아니다. 산 아래 옥문지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향기와 섞인 퀴퀴한 냄새다. 수수꽃다리에 속하는 것으로 개량 품종은 ‘미스김라일락’이다. 꽃의 옆모습이 정丁자로 보이고 향기가 좋아 정향丁香나무다. 긴 비탈 내리막길 잠시 배낭을 뒤진다. 무릎 아픈 일행을 위해 근육통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댔다. 오후 6시경 먼지떨이기 있는 등산로 입구까지 되돌아왔다. 

주사암.

 

유학사 왼쪽 언덕 등산로 따라 가면 옥문지는 흔적만 있는 샘터다.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는 골짜기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지만 그냥 축축하다. 작대기를 넣고 저으면 처녀 바람난다고 청년들이 옥문지를 지켰다 한다. 옛날 과거 보러 가던 선비는 부정 탄다 해서 고개를 돌렸고, 부임하는 고을 수령은 불경스럽다 해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때 이 일대 진격을 멈추는가 하면 유엔군은 골짜기를 보며 환호했다고 한다. 차를 몰고 내려가다 불지로 알려진 신평리 연못 쉼터에서 오봉산 여근곡을 바라보니 야릇하다. 기울어진 햇살에 오묘한 형상은 더 선명해졌다. 천년을 저렇게 드러내놓고 다 보여 주었대도 누군가 다시 볼까 참으로 민망스럽다. 

 

산행길잡이

(여근곡 주차장) ~ 유학사 입구 ~ 안부 갈림길 쉼터 ~ 능선길 ~ 전망바위 ~ 바위지대(코끼리 바위) ~ 오봉산 정상 ~ 임도 ~ 주사암 ~ 마당바위 ~ 주사암 ~  임도 ~ 정상 ~ 바위지대 ~ 전망바위 ~ 능선길 ~ 쉼터 ~ 유학사 입구(원점회귀)

※ 대략 6.5km 3시간 30분가량 걸림.

 

교통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건천 IC)

※ 내비게이션 →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여근곡 주차장

주차장 화장실, 유학사 등산로 입구에 먼지떨이기 있음.

 

숙식 경주 시내, 보문단지 내 호텔·리조트·여관, 다양한 식당 많음.

 

주변 볼거리 경주국립공원, 경주박물관, 보문단지,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황리단길, 감은사지 등.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